대운산만 높은 줄 알고 자란 '촌놈'이, 말만 들은 서울에 무작정(?) 올라와서, 정년퇴임을 하고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아직도 여기에 눌러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수구초심(首丘初心)은 어쩔 수 없어 울산에 있는 신문사란 말에 두 말 않고 "그럽시다"하고 집필을 승낙하고 나니, 할말은 많은 것 같은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타향살이 하는 사람들은 고향에 무엇을 두고 왔길래 늙어도, 늙어도 고향땅을 있지 못하는가? 거기에는 항상 웃음으로 맞아주는 호박꽃 같이 풍성한 모정(母情)이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울산에서 왔다고 하면 이름도 성도 모르면서 무조건 반갑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조롱박이 마주보고 눈인사를 나누면서 영글어 가는, 그러한 인정 속에서 자랐고,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정겨운 땅에서 자랐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한(恨) 많은 이 세상을 살다 가신 남창에서 산과 들을 벗 삼아 몸과 마음을 키웠고, 대운산 봉우리에 뜻을 세웠고, 미루나무 꼭대기에 흘러가는 흰구름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깨물면서 꿈을 키웠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았던 그 때에는, 맑은 냇물 속에 은어 떼가 뛰고 달렸었고, 버드나무 아래 황소가 한가히 하품을 했었고, 학교 뒷산 뻐꾸기는 하염없이 짝을 불렀었습니다.

뒷마당에서 목청을 뽑던 장닭소리에 놀라 허송세월하는 마음을 다잡기도 했고, 노랑 병아리가 어미 따라 종종걸음 치는 봄날에는 사랑을 배웠고, 까치 우는 아침에는 멍청하게도 보고 싶은 친구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내 가슴 한 구석에는 이러한 울산의 정서가 서려 있어,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칼바람 부는 북한산 밑에서도 기죽지 않고, 희망과 기대의 나날을 이어 온 것 같습니다.

울산을 생각하면, 들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에도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같이 영롱한 정한이 알알이 서려 있고, 동해남부선 철길 따라 애틋한 기억들이 아스라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울산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고 학교였습니다. 거기에서 순수한 미소와 함께 사랑을 배웠고, 이루지 못할 꿈도 꾸었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세상을 익혔습니다. 그 때의 그 눈빛으로 서울을 살아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울산을 잊지 못하는 것은 산천은 세월 따라 변해 가지만 가슴 속에 각인된 고향의 정은 '공업화' 그까짓 것 때문에 허물어질 수는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고향이라고 해서 마냥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요. 돌아보면, 배고픔과 돈설움에 울산 읍내로, 부산으로 뛰쳐 달아나고 싶었던 아린 기억이 묻어 있는 땅입니다. 그래도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상처 없는 독수리는 없다'는 말이 옳음을 깨닫습니다. 상처 없는 독수리는 태어나자말자 죽은 독수리뿐이라지요.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상처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를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이러한 상처를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아리처럼 눈을 흘기며 마주설 때도 있었지만,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너나없이 서로 돕고 감싸주는 순박하고 넉넉한 사람들이고, 개나리가 꽃단장을 하고 나오면 진달래가 기뻐하고 반기는 것같이 정다운 사람들입니다.

김 영 길 서울중앙지법 조정위원·서울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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