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이면 문득 떠오르는 유년의 추억이 있다. 덜익은 호두 껍질을 벗기다 누렇게 변한 손바닥. 비누로 모래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호두서리의 흔적…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쏟아지는 모든 비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우산 쓰고 걸어가도 바짓가랑이에 빗물이 튀지 않을 만큼, 낮잠 자는데 자장가마냥 감미롭게 적셔주는 그런 비를 좋아한다.

그런 날은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만화라도 보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세상만사 시끄러운 소음일랑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다 삼켜버리고, 더 없이 고요한 날 혼자 키득키득 웃으며 만화 삼매경에 빠져들던 재미는 지금 생각해도 아릿한 추억이다.

만화 보는 재미에 배고픈 줄 모르고 있을 때 "야야, 밥 먹자."라고 어김없이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 물론 까마득히 지난 유년의 추억이지만 그 추억이 어른이 된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와 더불어 내게는 비 올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추억의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곤 한다.

아마 초등학교 3, 4학년은 되었을 것이다. 계절은 여름이 지나고 막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방바닥에 뒹굴며 만화를 보다 더 이상 볼 것이 없어 심심해진 우리는 각자 우산을 받쳐 들고 동네를 빠져나왔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온통 말줄임표의 부슬비에 젖어 물방울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다. 고무신을 신고 오리처럼 뒤뚱뒤뚱 풀들을 헤쳐 가면 물방울이 신발 속으로 스며들어 발은 발대로, 신발은 신발대로 미끈거렸다. 하마터면 논둑 밑으로 처박힐 뻔한 위험을 감수하며 우리가 가는 곳은 바로 성진이네 호두나무 아래였다.

성진이네 호두나무 두 그루는 아주 컸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나무 아래는 고요했다. 간혹 나뭇잎에 맺혀있다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이 정수리에 떨어지면 서늘할 정도로 차갑긴 했지만 우리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산을 접어서 거꾸로 쥔 채 머리 위의 호두나무 가지를 잡아당기면 깨알처럼 검은 점들이 박힌 연두색 호두가 손에 잡혔다.

그렇게 호두를 얼마간 따서는 풀 숲 사이로 흐르는 물에서 호두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다. 아직 호두가 덜 아문 터라 호두 껍데기가 잘 까질리 없었다. 잘 까지지 않는 호두 껍데기를 납작한 돌에다 쓱쓱 밀면 호두알을 싸고 있던 껍질이 달아나고 드디어 그 속에서 딱딱한 호두가 드러났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갈 때는 친구와 나의 주머니는 주머니마다 불룩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호두 몇 개를 쥐고 호두를 돌리면 '따닥따닥' 부딪치는 감촉이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만큼이나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 서리의 흔적이 우리의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부터 손바닥을 함부로 펴지 못했다. 어쩌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손바닥을 펴기라도 한다면 '너, 호두 서리했지?' 뜨끔한 한마디에 가슴이 저릴 게 뻔했으니까.

누렇게 변한 손바닥은 한 일주일 동안 우리의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지독했다. 비누로, 모래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호두 서리의 흔적은.

어슴푸레한 기억은 내내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오랜 앓던 신경통이 도지는 것처럼 우산 두 개가 논둑길을 나란히 걷는 그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펼쳐지는 것이었다. 아마 이 기억은 아래 시처럼 내가 이 지상에서 눈감는 마지막 그 날까지도 나를 따라 다닐 것이다.

'건조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세상은 물기 한 점 없이 메말라 가고, 세상의 먼지는 밑도 끝도 없는 풍문에도 일어섰다 가라앉았다. 그런 나날의 어느 날 아침, 세상은 엷은 물색을 띠고 있었다. 가늘게 다듬은 빗줄기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꺼칠하던 감각은 간지럼을 탔다. 아스팔트를 뚫고 땅 속으로 스며들기엔 너무 가벼운 비의 무게. 투명한 세상은 잠시 화면 조정의 시간. 목마른 기억 저편 주럭주럭, 풀잎 때리는 추억엔 새순이 돋았다. 잠결에 스쳐 가는 감미로운 소리. 이불을 덮지 않아도 포근했다 유년의 고향이 보이는 꿈속에도 보슬비 내리고 친구와 호두 서리하러 가는 논둑 길 발이 미끄러지면 잠결에 웅덩이가 파이곤 했다. 건조한 바람만 공단의 공해를 끄집고 오던 한낮, 즐거운 빗소리를 듣는다.'- 졸시'건조한 시대'

유 정 탁 시인·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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