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그렇게도 좋아 하시던 님을 오늘 오전의 장례 후 오후에 남한강을 굽어보는 여주땅에 하관합니다. 여해(如海) 강원용님을 북녘 함남 이원군 고향땅에 쉬시도록 해 드리지 못한 쓰라린 가슴을 님의 후예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달래볼 길이 없습니다.

님의 소천비보를 접한 17일 오후부터 눈물을 주체키 어려웠습니다. 정말 바다처럼 넓고 깊게 사시다가 90에 가까운 장수를 하셨으니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님같은 큰 별을 우리 시대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격의 감루(感淚)였습니다. 잠을 설치고 다음날 서울대병원 빈소에서 국화 한송이를 님의 영전에 바치는 제 손이 몹시 떨리는 것을 평생 처음 느꼈습니다.

함석헌, 김재준, 한경직님들이 소천 하셨던 때에도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이 없지는 않았는데 손에 전율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이 아우도 이제는 팔순고개를 가깝게 바라보는 나이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님께서 보여주신 청년정신이 아직은 있기에 비교적 건강하게 살고 있어서 손이 떨리는 일은 아직 없습니다.

님께서는 한반도 한민족의 사람으로는 너무도 크고 넓고 깊은 한 삶을 사셨습니다. 관북땅 깊은 산속 화전민의 아들로 아주 조용하게 살다가 가실 수도 있는 한 촌사람입니다. 그런데 소를 팔아 70원을 가지고 18세에 두만강을 건너 간도 용정으로 갔습니다. 민족시인 윤동주, 통일의 선봉 문익환님이 함께 했던 은진중학이었습니다.

그 거칠고 험난했던 만주시대의 맑은 혜란강에 조약대를 세우고 님께서는 한숨에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날아가고 다시 캐나다와 미국으로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세계기독교협의회와 세계종교평화회의의 중추적 역할을 위해 님께서는 땅보다 바다를 더 날아 다니셨다 해도 좋을 만큼 오대양을 누비고 다니셨습니다. 오천년 민족의 역사 속에서 님처럼 넓고 높고 깊게 한 짧은 인생을 지구촌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데 몰두했던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자기의 발판, 자신의 나라와 사회의 기초에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님께서는 달랐습니다. 일제 식민지의 반도강산을 몰라라 하고 중국, 일본, 북미에서 좌정하고 편하게 살기를 거부하고 님께서는 이 민족의 태풍으로 이어지는 비상사태 속에 깊이 파고들어 분단과 분열, 분쟁과 분파의 중병치유에 앞장섰습니다. 때로는 감당키 힘든 오해와 멸시를 당해도 바다처럼 관용하고 심신을 내던져서 대화에 힘쓰고 그 높은 벽을 넘는 지혜를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 님의 남기고 가신 육신을 땅으로 돌려보내는 제 마음을 부들부들 떨게 하는 한두 가지 일들이 머리를 떨구고 기도하게 합니다. 하늘에서 이제는 모든 인간의 괴로움을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에 계실 님께서 못난 제 마음을 인자한 웃음으로 받으시기를 빕니다. 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70년대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 님께서는 아카데미의 짐을 제게 맡기려고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설득하셨습니다. 그때 중동의 전쟁상태가 저를 놓아 주지 않아 귀국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께 붙들고 흐느끼며 울었던 그 밤을 저는 못 잊습니다. 다시 용서를 빕니다.

적십자 총재의 자리에 있던 몇년 전 늘 님께서 숙원해 오셨던 누님 만나기를 제 힘이 닿는 대로 주선해 보려고 했습니다. 노령에 병환까지 있어 함경도에서 고생하고 있던 누님을 허락만 되면 헬리콥터라도 타고 날아가서 마지막 이산가족 상봉을 하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 하셨는데 끝내 그 일은 꿈으로 끝이 났습니다. 지난해 누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던 님의 모습을 다시 생각합니다. 한민족의 한을 님께서는 가슴에 깊이 묻고 바다처럼 넓고 깊게 사시다가 하늘로 날아 가셨습니다.

님과 같은 큰 별을 바라보며 살아 온 행운을 감사합니다. 님이 안 계시는 세상, 이 깜깜한 밤을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합니다. 밤하늘의 별들 속에 님의 얼굴을 그려보며 살겠습니다.

대한적십자사 전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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