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사정없이 빠르게 바뀐다. 격변의 와중에서 분실한 것과 새로 얻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 목록은 너무 길어 아무도 전체목록을 작성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분실품 목록에 끼워 넣은 뒤 밑줄 하나 실하게 그어둘만한 것이 있다. '고모령(顧母嶺)'이 그것이다.

전국적으로 고모령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서너 군데 있다. 언양읍 반천리에 있는 산골마을 '고무재'도 고모령과 같은 말인 '고모재'의 변형일 것이라는 설이 들린다. 고향을 떠나는 자식이 어머니를 돌아보는 고갯마루. 어머니는 동구 밖에서 자식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동안 손을 흔든다. 이 풍경 속에는 혈육간 이별의 슬픔, 외롭고 고생스러운 타관생활에 대한 불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 고향 그리움, 금의환향의 꿈이 뒤엉켜 있다.

그래서 고모령의 고갯길은 아리랑고개, 보릿고개와 같이 온 겨레가 '힘들게' '슬프게' 넘어간 삶의 고비들을 함축한다.

고모령의 이편과 저편을 찬찬히 살펴보면 보통사람들의 삶의 빛과 그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늑하고 포근한 보금자리와 험난한 가시밭길 사이에 그것은 위치한다. 이쪽에는 정든 땅이 저쪽에는 낯선 거리가 있다. 고개 너머 전장에는 포연이, 고개 안쪽 산골마을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시집살이 삼년 만에 친정 가는 아낙도 이 고개를 넘는다.

한국가요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은 '애가'를 우리 가요의 중요한 한 장르로 다룬다. 고모령의 정서를 주제로 삼는 노래들은 애가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중 많은 노래들이 다수 국민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일제식민통치, 해방과 국토분단, 6.25전쟁, 인구의 대규모이동을 수반한 경제개발-이들 역사의 물굽이마다 이별의 눈물 홍수가 반도의 방방곡곡을 휘몰아쳤다. 어찌 보면 지난 백년의 민족사는 가슴 아픈 이별의 대량생산 공장이었다.

사람들은 고모령을 넘어 만주로 사할린으로 떠났다. 정신대로, 징용이나 징병으로, 베트남전쟁으로, 삼팔선을 넘어 남으로 혹은 북으로, 서독광부로, 중동 건설현장으로, 도회지 방직공장으로 떠나면서 넘던 고개. 고개를 넘어간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생긴 남북이산가족만도 천만을 헤아리는데 지난 백년간 혈육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다 합치면 몇 천만이 될까. 1억을 넘지 않을까. 이 숫자도 엄청나거니와 하나하나의 이별에 담긴 아픔이 유난히 컸던 까닭에 민족 전체가 감당한 이별 고통의 총량은 무한정 불어났다.

몇 년이 지나야 다시 만날지. 편지내왕은 가능할지. 전장은 얼마나 위태로운지. 격랑의 역사와 가파른 시대상황은 선량한 사람들의 불가항력적 이별에 중형의 벌을 예사로 내리고 있었다. 고모령을 넘어간 자식으로 인하여 멍들고 병든 어머니들의 얘기는 그칠 날이 없었다. 그 무렵의 민초들이 그리도 많은, 그리도 애절한 이별노래와 고향노래들로 중무장(?)한 것을 보면 이별의 아픔을 견디어내려는 그들의 몸부림이 꽤나 처연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세상이 바뀌면서 시나브로 흔적을 감추던 고모령은 이제 추억 속에서만 남아있다. 사람 사는 곳에 이별이야 어찌 없으랴마는 물질적 풍요에 곁들여 교통과 통신의 눈부신 발전으로 석별의 정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의 빛깔과 내용에도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고모령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기준으로 세대구분을 해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세대차이가 뚜렷해졌다. 어쨌든 '고모령'식 이별의 민족 수난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새 세상을 열어준 것은 고모령을 넘어간 그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종대 전 대우자동차 회장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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