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코미디언이 폐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한 사실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사람과 어떠한 친분도 없었거니와 그 사람이 얼마나 유능한 코미디언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언론에 보도된 피상적 내용에 불과하므로 그가 사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그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갖은 고생을 하다가 40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을 드라마틱하게 살다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나에게는 항상 그렇듯이 무감각하게 대응하여 온 신문의 유고란에 매일 등장하는 수많은 인사들의 사망소식처럼 처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고 하여야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갈수록 뭔가 다르게 그 사람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가슴뭉클한 감동이었다. 그 감동은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나 그 사람의 죽음과 관련된 극적인 요소에 의해서 촉발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감동받은 것은 그리 유복하지도 않았고, 그리 부러울 것도 없는 그의 삶의 족적이 끊긴 것에 대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어마지 않는 사람들의 진심어린 존경심에 대해서이다. 그의 죽음에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눈물이 진심 그 자체로 다가왔다.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의 죽음에 대해 진심어린 눈물과 그의 생전의 삶에 대한 진실한 존경을 헌사하는 광경은 정말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그 사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TV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면서 살아있는 내가 도리어 그 사람이 부럽기까지 할 정도였으니 내가 느낀 감정적 충격은 상상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부러움은 나의 값싼 명예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 할 줄 아는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산자들의 진심어린 존경을 받으며 먼 길을 떠나는 죽은 자의 삶에 대한 경외의 감정이 뒤섞인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건전한 사회의 건전한 기풍으로서의 존경이라는 감정이 자취를 감춘 것 같다. 우리사회가 이제는 타인으로부터의 존경이나 타인에 대한 존경에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존경할 것도 없고 존경받을 일도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급격한 고도성장의 결과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최상의 선이 되는 사회가 된 것은 아닌지하는 우려가 드는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가 최우선이 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의 관심은 누가 게임의 룰을 최대한 이용하여 때로는 악용하여 최상의 성과를 낳았는가에만 집중될 뿐이다. 물질적인 풍요가 최우선이 되는 사회에서 정보와 권력은 집중되고 독점된 정보와 권력은 물질적 풍요를 재생산하는데 다시 집중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수에의 집중은 다수의 소외를 낳기 마련이고 정보와 권력에의 접근 및 재생산으로부터 소외된 대다수 사람들은 게임의 결과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의 성취자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지위에 정상적으로 게임이 진행되었더라면 부여되어야 마땅할 존경보다는 질시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고 그 의혹이 사실로 규명되는 경우에는 의혹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불신의 골을 더욱더 높이 쌓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누가 누구를 존경한다거나 누군가로부터 존경을 받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허무와 냉소적 분위기만이 만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와 같은 허무와 냉소적 분위기가 현실적으로 바로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무총리 인사청문회나 각종 게이트에서 밝혀진 소위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살아온 모습들이야말로 대다수의 국민들을 허무하게 냉소 짓게 하는 하나의 블랙코미디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도리어 역설적으로 한 직업적 코미디언의 죽음에서 허무와 냉소 대신 실종된 존경심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아직까지도 세상은 살만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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