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따라하고 싶은 표현 하나가 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흉내라도 내어보고 싶은 것. 바로 '고상해지기'다. 주로 고상한 척한다고 비웃을 때 사용하지만 '고상하다'는 것은 인품이나 학문의 정도가 높고 몸가짐에 품위가 있을 때를 이르는 말이다.

진정으로 고상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고상하다는 느낌은 단 한 번의 그럴듯한 분위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함께 어우러진 그 사람의 표정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이나마 너그러워 보일까 해서 나는 혼자 있을 때 가끔 얼굴 근육 푸는 연습을 한다. 말수가 적은 듯이 미소를 지으며 무엇이든 포용하는 듯한 표정도 지어본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의 노력일 뿐, 나의 본디 모습을 어쩔 도리가 없다.

사소하게 부딪치는 일상의 악재를 고상하게 넘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 날의 운세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좌우되는 거라 믿고 싶지만 생각컨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삼백 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쩌면 번번이 시시콜콜 따지고 흥분하는 일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동해안의 어느 대형휴게소 앞에서 여주인과 손님의 실랑이가 있었다. 그것은 휴게소 앞에 놓인 두더지 잡기 게임기 때문이었다. 두더지 잡는 그 기계는 손님의 아이가 밀어 넣은 돈, 삼백 원만 먹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당연히 돈을 돌려받으리라 생각했던 손님은 예상과 달리 냉담한 휴게소 여주인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엄연히 기계가 휴게소 정문 앞에 놓여있는데도 주인이 따로 있으니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깟 삼백 원을 가지고 뭘 꼭 받아가려고 하느냐"는 투의 여주인은 삼백 원이 문제가 아니라고 따지는 손님의 항의에 못 이겨 결국 삼백 원을 내놓았다. 자기와 상관없는 저놈의 기계 때문에 귀찮아죽겠다며 손님을 그 기계 대하듯 했다.

그날의 손님이었던 나는 주머니 속에 든 삼백 원을 만지며 허탈한 기분에 쌓였었다. 겨우 받아낸 삼백 원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녀의 말대로 '고깟 삼백 원' 때문에 말 대포를 쏘아붙이며 원칙을 따진 좀팽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보니 그렇잖아도 고상하지 않게 실룩거리는 내 입술 옆에 고춧가루까지 떡하니 붙어 있었다. 그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 거울로 확인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삼백 원을 찾은 대신 부끄러워진 얼굴과 얼룩진 감정은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내 감정 상하는지 모르고 삼백 원을 찾기에만 급급한 일이 내게는 많기도 하다. 삼백 원 보다 중요한 규칙과 도덕, 양심 등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들이기에 '고깟' 이란 말 자체가 고깝다. 나의 흥분은 언제나 삼백 원어치 밖에 안 되는 사소한 것들로 채워진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도 바쁘다. 왜 그 삼백 원이 중요한 건지. 왜 지나칠 수 없는 건지. 하필이면 왜 나를 이런 부당한 상황으로 밀어 넣는지 행운의 여신에게 원망도 해본다.

길가에는 돈만 먹고 빈 컵을 내려놓는 커피 자판기가 널려 있다. 그런 자판기 같이 양심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재수 없으면 빈 컵을 들고 나는 언제 또 돈을 돌려받으러 가야할 신세가 될지 모른다.

삼백 원 보다 더 큰 마음의 얼룩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고상하게 물러나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삼백 원 버리기.

고깟 삼백 원이 뭐라고 입 옆에 고춧가루가 묻은 줄도 모르고 포기할 생각을 못했을까. 그 여주인은 내 손에 삼백 원을 던져놓고 오히려 치사하다는 표정으로 휑하니 가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을 때 허허 웃으며 뒤돌아서버릴 줄도 아는 게 관용이라면 원칙을 중요시하며 돌아갈 줄 모르는 내가 갈 길은 험난하다.

거울을 자주 보고, 허허 웃는 연습을 하되 잊어버리지 말 것은 '삼백 원 버리기'.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해야 때는 삼백 원을 잃는 대신 고상해져보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흉내에 불과하더라도.

송영화 수필가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