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경남에서는 깊은 산골짜기를 말할 때 "함양·산청"이라고 한다. 경남의 가장 서쪽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산청과 함양은 말 그대로 깊은 산골짜기다. 진주를 지나면서부터 주변 경치가 울산과는 사뭇 다르다. 어디 쯤 바다가 있는 지 알지도 못한 채 한평생을 살았을 법하다. 산골은 산골대로, 바닷가는 바닷가대로 사는 모양새가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의 한 자락이 걸쳐 있고 북쪽으로는 기백산이 받치고 있는 함양·산청은 그러나 단순한 "촌"은 아니다. 고속도로를 감싸고 있는 높고 깊은 산에서 벌써 가볍지 않은 공기가 느껴진다. 길거리에 서있는 하찮은 나무 한그루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남명 조식이 있었고 고려말 대학자 점필재 김종직이 있었고 문헌공 정여창과 고운 최치원이 현감을 지냈던 곳이다.

 함양읍은 작은 고장이지만 고운 최치원이 조성한 상림숲, 조선 때의 유학자 정여창의 고택, 읍내나 계곡 가로 즐비하게 늘어선 누각과 정자 등 역사의 깊이를 말해주는 적잖은 볼거리가 자리하고 있다.

 함양 출신들이 옛 친구보다 더 그립다고 말하는 상림숲은 함양읍 운임리에 자리하고 있다. 강을 따라 도로를 사이에 두고 6만4천여평의 넓은 땅에 120여종의 활엽수림 2만여 그루가 빽빽히 들어서 있다. 1100여년전 고운 최치원 선생이 고을 태수로 있으면서 위천천의 홍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인공림이다. 숲 속에 사운정, 함화루, 대원군척화비, 문창후신도비, 석불 등이 있으며, 3천평의 잔디공원과 야외공연장도 갖추고 있다.

 상림의 숲은 상록수가 아니어서 더욱 좋다. 늘 푸른 나무도 그에 따른 운치가 있겠지만 계절따라 새로운 얼굴, 전혀 다른 풍광을 전해주는 활엽수의 매력은 또다르다. 여름철에 무성한 숲을 이고 그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자지르지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듣는 일이, 가을이면 빨갛고 노란, 황홀한 색깔의 단풍이 영원히 상림숲을 잊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것을 벗어버린 앙상한 가지에 눈을 이고 선 겨울나무도, 연두빛 이파리가 볕을 바라고 반짝이는 봄나무도, 사계절 어느 때라도 가슴을 울리지 않는 날이 없다. 울산에도 최치원 같은 현감이 있어 강을 따라 이런 숲하나 조성해 놓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오늘날 울산이 얼마나 풍성하고 넉넉한 도시가 됐을까하는 욕심을 숲 속 오솔길에 떨어뜨려 놓게 된다.

 상림숲에서 24호 국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하동 정씨들이 모여사는 지곡면 개평리에 이른다. 그 마을의 한 가운데 정여창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안음(지금의 안의)현감을 지낸 일두 정여창은 조선 초기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문신으로 조선 오현 중의 한분으로 꼽힌다. 현재의 집이 있는 자리는 정여창이 살았던 터이기는 하나 그가 돌아가신 뒤 1570년(선조 때)에 건축된 것으로 하동 정씨 집안의 종손인 정병호가옥(중요민속자료 186호)으로 되어 있다.

 1만여㎡의 넓은 터에 여러 채로 이루어진 품격있는 전통기와집이다. 경남지방의 양반대가의 면모를 고루 갖추었다. 얄팍한 돌(박석)을 깐 골목을 들어서 돌담을 따라 걷다가 끝자락 쯤에서 솟을 대문을 만난다. 으리으리한 대감 댁 치고는 소박하다 싶을 만치 질박한 구조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다. 신영훈 한옥문화원장 "내루(內樓)에 올라 사랑채 전체를 한눈에 바라다보면 이 건물이 훤출하게 잘 생겼음이 느껴진다"며 "거므튀튀한 목재와 흰색 화강암 주초가 산뜻하게 어울리며 멋진 소나무가 자리한 석가산 구조의 정원이 사랑채 앞에 자리하고 있어 집주인의 안목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맛배지붕의 소박한 일각문을 통해 안채로 연결된다. 곳간이 이어지고 안채, 문간방, 안채의 대청마루, 건넌방, 부엌이 모두 잘 지어진 집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넉넉한 우물마루로 된 대청에 올라서면 휘어진 잘생긴 나무를 천연덕스럽게 사용한 대들보가 금세 마음을 편한하게 한다. 신영훈씨는 "다정하고 구수한 기품에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표현했다. 안채 안마당은 우물을 중심으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

 정씨 고택에서 나와 안의 쪽으로 가면 육십령 아래에 굽이굽이 절경을 이룬 계곡마다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팔담팔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네 곳만 남아있다.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다. 이 가운데 가장 이름난 농월정은 휘황찬란한 관광지가 되어 영 버려놓았다. 계곡의 품이 넉넉하고 물살도 좋고 정자도 빼어나 말 그대로 달을 희롱했을 법하건만 사람들의 발길 채여 만신창이가 다 되어 마냥 안타깝기만하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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