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바람에 싱그러운 가을 향기가 묻어나는 계절이 찾아왔다. 미리 준비한 벌초 기계와 벌초 후에 조상님 산소에 올릴 음식을 챙겨 길을 나선다. 약속한 산소 앞 주차장에 모두가 다 모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손자 며느리 증손자 까지 4대가 남녀 구별 없이 다 모였다. 오래 만이라며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조상님이 도우셨는지 벌초하기에 참 좋은 날씨다.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이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온다. 3개 지역별로 나누어서 벌초가 시작된다. 마치 한 문중이 원족을 떠나는 분위기다. 참 많이도 달라진 모습이다.내가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께서 벌초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미 고인이 된 분들도 있지만, 윗대 어른 몇 분이 큰 초배기에 밥과 막걸리와 물을 가득 담아 둘러메고 당신 몸 생각하지 않고 일주일 넘게 이 산소 저 산소 그 먼 길을 걸어서 벌초를 했다.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자하는 자식된 도리로서 온갖 정성을 다하는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예초기의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계속 들린다. 마치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주위를 맴도는 듯하다. 늦더위에 곤히 쉬던 조상님들이 벌떡 일어나 후손들을 반기는 것만 같다. '매사에 감사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라'는 음성이 들리는 예초기의 금속성 소음 속에 섞여 나온다. 벌초가 끝나면 정성껏 준비한 술과 음식을 올리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하는 인파가 산야에 넘쳐난다. 이동하는 도로마다 차들로 정체가 심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증손자까지 다 함께 조상의 묘에 풀을 깎아주면서 묘소를 손질하는 모습이 정겹다. 우리의 고유한 아름다운 풍속도이다. 예초기와 차가 있어 일주일 이상 걸리던 벌초가 하루 만에 끝이 난다. 비지땀을 흘리며 이산 저산을 누비지만 친족이 함께해서인지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 상큼한 풀 내음이 한결 심신을 가볍게 한다. 지역별 벌초가 끝나면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며, 지난 옛 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잔칫집 분위기이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함께 어울리다보니 어느새 한집 식구 같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다. 무엇보다도 자라는 아이들이 촌수를 알게 되고 유대가 돈독해진다. 자신과 가문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며 조상으로부터 이어지는 뿌리를 찾아 자신들의 위치를 알게 된다.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교육의 장이며 축제의 장이다. 푸짐하게 마련한 점심을 먹고 나면 모두 모여앉아 회의를 시작한다. 축하의 박수도 터져 나온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어르신들의 밝은 미소가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자녀들의 효 교육은 저절로 된다. 가장 좋은 산 교육장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쩔 수 없이 남에게 벌초를 맡기는 집안도 있지만 자손들이 함께하는 이 날은 멀어져가는 혈육의 정을 느끼며 친목을 도모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조상의 유덕을 기리는 소중한 시간이다. 또한 가족의 소중함과 부모님의 은혜를 깨우쳐주는 계기로 삼는 좋은 기회이다. 벌초는 더욱 발전 시켜나가야 할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이다.

이동웅 울산여고 교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