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자란 나는 이맘때면 과수원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형이랑 함께 어머니가 주신 쌀겨자루를 메고 기찻길을 넘어 동네 어귀에 자리잡은 과수원을 찾아 가면 과수원 주인은 그 쌀겨자루에서 쌀겨를 옮겨 담고 대신 사과를 가득 넣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것이 바로 낙과였다. 먼 길을 돌아 오면서 먹어 본 그 사과는 지금도 군침이 돌 정도로 상큼했던 기억이 난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서로가 불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것으로 교환한 셈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사과에 대한 이미지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사건이지만 지난 93년 8월 금융실명제 실시이후 "사과상자"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었다. 당시 거액의 뇌물사건이 서민들에게 충격을 주던 때라 사과상자에 대한 말꼬리가 눈덩이처럼 불어 났었다. 사과상자가 뇌물전달 용기로 크게 애용되었다는 사실보다도 그 규모에 놀랐기 때문이다.

 지난 96년 4월 전두환 전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2차공판때라고 기억된다. 당시 경악과 함께 분노를 몰고온 사진 한장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사과상자는 여론의 급물살을 탔다. 전씨가 재임중 조성했던 비자금 중 일부를 금융실명제 실시후 변칙적 방법을 통해 현찰로 바꿔 모 기업의 경리부 지하창고에 은닉해 두었다가 검찰에 꼬리를 잡힌 현장 모습이었다. 대형금고 뒷쪽에 쌓아 둔 25개의 사과상자에는 모두 1만원권 지폐로 가득 담겨 있었다. 어른 키 높이로 5개씩 5줄로 화물처럼 위장되어 있은 돈이 무려 61억2천750만원. 그야말로 말문이 막힌 거액이었다. 국민에게 준 충격은 뒤로하고라도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더해져 전국이 사과상자 얘기뿐이었다. 나도 이 때 처음으로 사과상자의 가로 세로 높이가 51cm, 36cm, 27cm라는 것과 그 공간에는 신권으로 2억4천만원, 신권과 구권을 잘 섞어 넣으면 2억원이 들어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과상자는 그 이후에도 한보사태로 인해 시중은행장 두명을 오랜 금융계 생활에서 불명예스런 종지부를 찍게 하는 등 치욕의 응어리로 점철됐었다.

 이처럼 사과상자가 크고 작은 뇌물사건에 필수품으로 쓰였다는 보도를 접하다 보니 어느새 "사과상자"하면 일단 "검은 돈 전달용기"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먼저 떠오르게 됐다. 자의든 타의든 어른들의 부도덕성과 추악한 모습의 단면을 담고 있어서 사과를 보면 왠지 한 켠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제 먹어 본 사과는 풋풋한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위에 놓여진 한 알의 사과는 향수를 달래주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애플데이 입니다" 농협에 다니는 후배의 간략한 메모는 많은 것을 함축하는듯 했다. "학교폭력 예방 및 즐거운 학교 만들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학교폭력대책 국민협의회"가 둘(2)이 사(4)과하는 날이란 의미에서 10월 24일을 "애플데이"(Apple Day)로 정했다고 한다. 애플데이는 "사과"(apple)의 영어발음으로 평소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 못했거나 미안했던 친구, 부모, 선생님, 제자에게 사과(謝過)와 화해의 징표로 사과 한 알을 선물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협의회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의 편지를 공모, 우수 사연으로 선정된 학생에게 사과 한 상자를 학교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 사과 한 상자에는 사랑의 마음과 밝고 진솔한 사회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우리. 쑥스러움에 사과하는데도 인색했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공개적으로 용서와 화해를 전하는 "애플데이"를 아량과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건전한 선물문화로 당당하게 정착시키는 것도 이제 어른이 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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