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가면 우리 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칠촌 숙부가 살고 계신다. 그냥 편하게 아재라고 부르지만 내가 존경하는 사람 중에 한 분이다. 나이 차가 많은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데다 농투성이라 가진 것도 고만고만하지만 심지 하나는 닮고 싶을 만큼 곧기 때문이다.

아재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나에게는 팔촌 동생이 되는 큰 아들이 다섯 살 때의 일이다. 그 동생은 늘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녔고 할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첫 손자라 누구보다 먼저 챙기셨다.

할아버지께서 쇠죽을 끓일 볏짚을 기계 작두로 썰고 있었다. 볏짚이 좀 모자란다 싶어 볏짚을 가지러 간 사이 그 동생이 할아버지 흉내를 냈다. 바닥에 떨어진 볏짚을 주어 작두 입에다 집어넣었다. 무심한 기계 작두는 순식간에 그 여린 아이의 오른팔을 빨아들였다. 대수술 끝에 팔은 어깨 아래로 완전히 잃고 말았고, 할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말문을 닫으셨다.

동생은 외팔이로 인해서 가끔씩 속을 썩이기도 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개구쟁이였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일꾼이기도 했고, 제 동생에게는 다정다감한 형이었다.

그 동생이 중학생이던 어느 날, 동생은 친구랑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로 했다. 동생은 트랙터의 짐칸에 타고 동생의 친구가 운전석에 앉았다. 그러나 중학생의 서투른 운전에다 좁은 방죽을 과속으로 달리던 트랙터는 방죽 아래로 굴렀고 동생은 그 트랙터에 깔리고 말았다.

시골이어서 한참이 지나서야 119가 왔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운전석에 있던 동생의 친구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다. 아재에게는 청천벽력이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다만 매장을 하느냐 화장을 하느냐를 두고 친척 어른들과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아재는 매장을 원했고 어른들은 화장을 고집했다. 결국 아재는 어른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여물다 만 꽃씨를 따 언 강가에 뿌린다 / 바람결에 여위어가는 갈대들의 울음소리 / 노을 진 물빛 가르며 길 떠나는 빈 배 하나'(강가에서)

아재는 속울음을 삼키며 피어보지도 못한 꽃씨를 강가에 뿌렸다. 얼마 뒤 사고를 낸 학생의 집에서 합의금을 들고 왔다. 그러나 아재는 장례식에 든 비용만 제한 채 고스란히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아들의 친구를 불러 이제부터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다.

오랜만에 강가에서 산책을 했다.

태화강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는 푹신해서 걷기에 참 편했고, 노란 유채꽃과 초록 천지의 보리밭 그리고 대숲 사이로 강물이 흐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는 자부심을 피부로 느낄 만 했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자부심을 느낄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선진국에서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법적인 구속력을 떠나 우선 장애인에 대한 인식부터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과학과 의술이 발달해도 전 인류의 1할 정도는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으며 내가 받아야 할 고통을 그들이 대신한다는 종교적 신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항상 장애인을 우선 배려한다.

장애인의 달인 4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심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도 뜻하지 않는 일로, 또 나이가 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가 많이 성장했다고 자부하는 경제력 정도 만이라도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성숙해지면 좋겠다.

김종훈 범서초등학교 교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