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릴 지 모르는 울산시 북구 농소2동 달천철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삼미금속(주) 광업사업본부에 의해 철생산이 되던 달천철장이 최근들어 아파트를 지으려는 건설회사에 팔려 보존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뜻있는 시민들은 "달천철장의 역사는 곧 울산 철생산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울산시 곳곳에서 야철지와 쇠부리터가 발견되며 쇠부리놀이라는 민속놀이도 전래되고 있어 그 역사를 보존하는 의미에서 달천철장의 보존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달천철장의 중요성과 보존에 대해서는 이미 관심있는 사람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으며 특히 지난해 10월15일 일본 히로시마대학 고고학 연구실 내 다다라연구회 시오미 히로시 회장(히로시마 대학 명예교수)가 울산시장 앞으로 "달천철장보존요망서"를 보내옴으로써 더욱 강조되었다.

 시오미 회장은 이 편지를 통해 "달천철광산은 한국만 아니고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세계에 걸쳐 고대국가 형성기에 있어 철의 생산과 유통을 고찰할 수 있는 상당히 중요한 유적"이라며 "이 귀중한 유적으로 귀시의 도시계획과 함께 공존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향토사연구가 이유수씨는 그가 내놓은 책자를 통해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말하는 중국까지 철을 수출했던 변진의 철산지가 달천철장으로 철기시대로 들어간 BC 3~4세기께부터 쇠를 생산했을 것"이라며 "달천광산은 삼한시대부터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 근거로 지난 1993년 철제갑옷과 다량의 철제무기가 발굴된 중산리 유적을 비롯해 농기구와 철모 등이 출토된 웅촌 하대유적과 다전동 고분군 등을 제시한다.

 ------------------------

 ◇달천철장의 역사

 달천철장은 쇠의 함유량이 높고 채광이 용이한 천혜의 광산으로 한말까지 2천여년에 걸쳐 한반도 제1의 수철공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68년까지 등록광구가 20만평이었고 1964년 현재 잔여매장량이 142만4천400MT에 이르렀다. 이 중 철 함유량은 41.8%로 연간 생산계획량은 8만5천MT로 기록하고 있다. 1960년까지는 구릉지대에서 토철을 채취하고 왔으나 이후 지하에서 채굴했다.

 달천철장에 관한 기록은 정종 1년(1399년)에 왕지를 통해 지울주사 이종주가 관리하도록 한 데서 나타난다.

 이어 태종 때는 백동철과 수철 생철 1만2천500근을 공물로 바쳤으며 예종 때는 정철 479근을 세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16세기 후반에 들어 철장이 국가관리를 벗어남으로써 달천철장의 역사가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효종 8년(1657년)에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 사람인 이의립에 의해 다시 이어진다.

 "경주이씨관란선생세보" 〈구충당이의립선생전〉에 따르면 달천철장을 재발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의립의 13세손까지 대를 이어 달천철장을 관리하다가 한일합방이 되기 전 1906년 달천광산은 일제에 넘어갔다.

 달천철장은 해방을 앞둔 1943년 다시 개인에 돌아왔고 1964년 12월 대한철광개발(주) 울산광업소라는 국영기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1966년 기계 선광장을 준공하여 하루 500톤을 생산했고 그해 12월 다시 민영화되었다.

 이때까지는 구릉에서 철을 채취하다가 1974년부터 굴을 파기 시작했다. 최초로 60m를 파들어갔다. 그 뒤 점진적으로 깊이를 더해 1986년에는 심도 335m까지 들어갔다. 생산량도 1981년 월 1만3천톤으로 늘어났고 1990년에는 1만5천톤으로 증설됐으나 점차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1993년 철광석 생산작업이 종료됐다. 최근까지는 사금석만을 채취하고 있었다.

 상호도 1982년 삼미광업개발(주) 울산광업소대한철광개발(주) 울산광업소에서 1987년 대한철광개발(주) 울산광업소로 바뀌었다가 1996년 삼미금속(주) 광업사업본부로 개칭됐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