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을 떠나온 지 아직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열강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기억 저편으로 아련하게 느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인들과 현직에 계신 여러분들이 퇴임 후 근황을 물어 온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해 하기도 하고 교단을 떠나 잘 지내고 있는 지 걱정해주는 말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염려해주니 한없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듣기에 좀 생뚱맞은 대답일지 몰라도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과로사 하겠습니다"이다. 교단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적인 일들에 중독되어 나이를 생각지 않고 과욕으로 몸을 움직였더니 몸에 이상이 생겼다. 그로 인해 한의원을 찾아 물리치료를 받을 정도이다.

하고 싶었으나 시간에 쫓겨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즐겁게 살고 있으니 몸에 이상이 좀 생긴들 어떠랴 싶다. 잊고 지내고, 놓쳤던 소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연의 순결함에 내 마음을 내어 주며 더불어 하루를 보내니 이렇게 살다가 과로사 한들 그것이 대수겠는가 싶어 과욕을 부려보기도 한다.

요즈음은 매주 한 번 혹은 울적할 때면 산을 찾는다. 정리되지 않은 산에 인부를 데려다 며칠 손을 보니 제법 모습이 갖추어져 그 후로는 혼자 그곳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자유로우니 어떤 날은 새벽 4시에 집을 나선다. 어둑어둑 먼동이 떠오르기 전에 영혼을 맑게 하는 산속의 아름다운 정경을 한껏 느낀다.

흙을 밟으며 자연과 함께 이야기하며 많은 생각들을 마음껏 정리할 수 있어 좋다. 혼자 태어나서 홀로 가는 인생.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나 홀로 벌써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길가에 피어난 잡초는 사람이 몇 번이고 짓밟고 지나가도 한마디 대꾸하지 않고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인간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촉촉히 내리는 아침이슬을 맞으며 산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먼동이 튼다. 숲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새벽 풀 냄새가 가슴을 진동한다. 큰 나무 작은 나무 큰 풀 작은 풀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숲들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혼자서 태어나 홀로가지만 삶은 혼자일 수 없다. 자연도 흙과 물, 태양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고 성장한다. 땅은 나무를 정성껏 떠받쳐주고, 물은 땅을 흠뻑 적셔준다. 나무들은 자양분을 혼자 차지하지 않고 주고받으며 조화롭게 아름다운 숲을 이룬다.

어제의 연초록이 어느새 짙은 녹음으로 변하고, 가냘픈 작은 망개 잎이 손바닥만큼 성큼 자랐다. 시시각각 변하는 새로운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각자가 저렇게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니 숲이 병들지 않고 푸르고 아름답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저 모습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무런 말이 필요 없다. 여기서 텐트치고 토끼와 노루를 벗 삼아 함께 밤을 새며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솔바람 따라 아이들의 함성이 바로 숲에서 들려온다. 어린 시절 대밭속의 추억들이 함께 펼쳐진다. 숲 속 교실의 첫 수업시간이다. 아침 이슬내리는 소리, 바람결에 들려오는 이름 모를 풀벌레의 사랑이야기, 노루가 기지개를 펴는 소리며 나뭇잎끼리 서로 부대끼며 내는 간지럼 타는 소리, 이 맑고 깨끗한 욕심 없는 자연의 리듬에 듬뿍 취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이 부러울까.

자연은 말로 교육하지 않는다. 숲에는 질서와 희망, 양보와 여유, 사랑과 정서, 나눔과 조화 그리고 풍요와 가르침이 있다. 이 작은 숲에서 지나간 삶의 의미와 흔적들을 찾는다. 아무리 좋은 교육도 자연의 말없는 가르침을 능가하지 못한다.

숲 속 교실이 더없이 정겹고 아름답다. 우리 아이들이 자연과 가까이 하면서 자랄 수 있길 소망하면서 오늘도 바람결에 실려 오는 상큼한 숲내음에 흠뻑 취한다.

이동웅 전 울산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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