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주창한 현대 프랑스 철학의 대표적 선구자
비정상인과 단편적 고고학에 더 심취한 철학사상
재소자·동성애자 인권개선 위한 사회운동 적극 참여
권력 절차에 따른 모든 사회 담론의 재분배 주장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선구자이며,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과 더불어 구조주의의 4인방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전통철학에서 배제됐던 광기, 병원, 감옥, 섹슈얼리티, 지식고고학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푸코는 프랑스 푸아티에에서 부유한 외과의사 폴 푸코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에 있는 앙리4세 리세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46년에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입학했다. 여기에서 푸코는 헤겔철학의 권위자 장 이폴리트에게 정신철학을 배웠다. 그러나 푸코의 반응은 헤겔과는 전혀 다른 방향, 즉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타났다. 이 학교에는 장 이폴리트 외에도 과학사 교수 조르주 캉길렘(1904~1965), 신화학자 조르주 뒤메질(1898~1986)과 같은 훌륭한 스승들이 있었다.

그는 주로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가 주도했던 실존주의 철학이나 후설과 퐁티의 현상학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들로부터 영향받은 푸코는 인간 주체가 자기 자신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게 된 배경과 과정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948년에 소르본느대학 철학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푸코는 심각할 정도의 우울증에 시달렸다. 푸코는 면도칼로 자신의 가슴을 그었으며, 칼로 동료 학생을 위협하기도 했다. 심지어 약물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한편, 동성애에 대한 집착도 구체화됐다.

1949년 푸코는 심리학 학사과정을 수료했으며, 그 이듬해에 루이 알튀세(1918~1990)의 영향으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1953년 탈당). 1951년에 철학교사자격을 취득했으며, 심리학 공부를 계속해 그 이듬해에 파리대학에서 정신병리학 석사(디플롬)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파리의 생트 안 정신병원을 방문해 토대 연구에 착수했으며, 정신의학자 자클린 베르도를 도와서 루트비히 빈스방거(1881~1966)의 '꿈과 실존'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입문서를 쓰기도 했다. 푸코는 1954년에 자신의 첫 저서인 '정신질환과 개성'을 출판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푸코는 현상학, 실존철학, 마르크스주의를 심리학 해석방법론으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1955년에 뒤메질의 추천으로 푸코는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프랑스어 강사로 초빙돼 1958년까지 4년 동안 활동했다. 프랑스 문화원의 책임자를 겸하면서 구조주의적 언어이론에 몰두했다. 그러나 푸코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음주운전 사고를 내기도 하고 남자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1958년 푸코는 바르샤바대학의 프랑스문화원장으로 부임한다. 그러나 한 청년과의 성 관계가 알려지면서 폴란드 주재 프랑스 대사로부터 바르샤바를 떠나라는 권고를 받았다. 1959년부터 2년 동안 함부르크 프랑스 문화원장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푸코는 스트립쇼 클럽, 진흙탕 여성 레슬링, 홍등가 등을 전전했다. 이 때 푸코는 반전운동가인 다니엘 드페르와 교제하면서 '광기의 역사' 집필에 필요한 연구를 완료한다.

1960년에 푸코는 클레르몽 페랑대학 문학부에서 심리학 강사로 일했으나, 이곳에서 만난 공산주의 철학자 로저 가로디(1913~)와 심각한 불화에 빠지게 됐다. 1961년에 푸코의 프랑스 국가박사 학위 청구논문인 '고전주의 시대에서의 광기의 역사'가 출판된다. 영어판 '광기와 문명'은 이 논문의 축약본이다. 푸코는 과학적 이성의 관점에서 광기의 문제를 다루었다. 각 시대마다 광기가 경험되고 전파되는 방식들을 현상학적으로 보여주면서 광기 그 자체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중세에는 광기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우둔하면서도 고상한 인간상으로 묘사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기는 사회와 공존했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부터 광기는 빈민이나 범죄자처럼 감금의 대상이 됐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부터 정신의학의 대상 개념으로 정착되면서 광기는 무의식의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됐다.

1962년에 푸코는 클레몽 페랑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된다. 이듬해에 푸코는 1790년에서 1820년 사이에 발표된 임상의학서들을 연구한 '임상의학의 탄생'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임상의학적 지식의 규칙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지식이 어떻게 생성, 변화, 발전하는가를 보여주면서 공간과 언어와 죽음의 문제, 즉 의학적 시선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시대를 거쳐서 진화하는 의학적 지식의 담론 구조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푸코는 1964년에 집필한 새 원고와 그 이듬해 브라질에서 행한 강의 내용을 묶은 '말과 사물'을 출판했다.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푸코는 서구사회에서 인간이 지식의 대상이 된 과정, 즉 '인간과학의 고고학'을 다루었다. 그는 르네상스, 고전주의, 현대라는 세 시기의 역사적 선천성을 규명함으로써 문화의 근원적인 코드를 발굴하고자 했다. 각 시대에 무의식적으로 조직된 사유의 퇴적물을 발굴하는 것이 바로 '고고학'의 과제이다. 고고학적 자료의 발굴을 통해 푸코는 사유가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는 논의 구조, 즉 에피스테메를 확보하고자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말과 사물의 유사성이 강조됐으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동일성과 차이가 뒤섞인 불연속적 표상의 문제가 중시된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 현대에는 인간 그 자체가 중시됐다. 유사성에 이어서 동일성과 차이(표상)보다 더 근원적인 역사적 주체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푸코는 18세기 말 이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1965년에 푸코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브라질로 가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했으며, 이듬해에는 모로코의 튀니스대학으로 갔다. 1968년 후반에 푸코는 삭발한 채 파리로 돌아왔다. 실험대학인 뱅센대학의 철학과를 맡았으나, 대규모 학생 폭동사태를 맞게 되면서 경찰에 체포됐다.

1969년에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을 저술한다. 이 책은 지식과 역사, 담론에 대한 방법론적 탐구서이자 자기 비판서이다. 푸코는 지식은 의견과 과학 사이에 존재하며, 텍스트와 실험도구뿐만 아니라 모든 실천과 제도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푸코가 새롭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담론'이다. 전통적인 사상사는 담론을 자료로 취급하지만 지식고고학은 그것을 기념비적 사건으로 다룬다. 푸코는 전체 앞에서 개체가 희생되는 헤겔의 역사철학보다는 한 사람의 영웅에게서 세계사의 정점을 찾으려는 니체적 관점에 충실한 것이다. 담론은 단순한 언어적 체계와 텍스트를 넘어서는 실천이다. 따라서 푸코는 자신의 철학이 구조주의의 경직성을 넘어서 있다고 평가했다.

푸코는 장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상체계들의 역사' 담당교수로 선출됐다. 1970년 4월에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취임강연에서 모든 사회에서의 담론은 권력의 절차에 따라서 통제, 선별, 조직되고 재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시기에 수감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실천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이때의 경험은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 반영됐다. 그는 1971년에 설립된 '혁명적 행동을 추구하는 동성애자 전선'(FHAR)에 참여했으며, 그해 11월 베르사이유 경찰서에서 사망한 알제리 노동자 문제로 항의 시위를 하던 중 프랑수아 모리악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1975년 푸코는 '규율과 처벌: 감옥의 탄생'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신체에 행사되는 형벌이나 신체 자체의 저항과 관련해 정치적, 사법적, 과학적 영역들에서 영혼과 육체에 관한 계보학을 보여주고자 했다. 특히 형벌의 집행 형태가 시대에 따라 공개처형에서 재판과 선고를 거쳐서 영혼에 대한 제어의 형태로 변화했으며, 감옥체계가 규율사회의 일부로서 창안된 것은 신체를 권력 기제로 운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1976년에 푸코는 '성의 역사' 첫째 권을 출판했다. 이 책은 본래 여섯 권으로 계획했으나 세 권 밖에 내지 못했다. 여기에서 푸코는 성의 억압기제 역시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푸코는 프로이트의 억압가설이 틀렸다고 비판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담론은 고해성사, 인구관리 등의 정치경제적 기제들에 의해 억압돼 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방과 확산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금지의 대상으로서 성은 도덕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였을 뿐이다.

푸코는 지식뿐만 아니라 성담론조차도 권력에 의해 통제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광기, 감옥, 병원 등의 용어들은 비정상인들을 지칭하고 있다. 이로써 푸코의 철학은 정상인보다는 비정상인, 체계적인 사상사보다는 단편적인 고고학이나 계보학을 더 중시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사실에서 푸코는 자신의 포스트모던적 위상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버마스는 푸코가 모든 진리의 기준을 약화, 오염시켰다고 비판했으며,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 역시 푸코를 '비역사적인 역사가' '반인간주의적 인간과학자' '반구조주의적 구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1984년 6월 25일, 푸코는 57세의 나이로 죽었다. 의사는 항생제가 폐혈증을 치료하는데 실패했다고 발표했으나 푸코는 오래 전부터 에이즈에 노출돼 있었다. 그의 친구 드페르는 자립적인 에이즈 단체 AIDES를 설립했다. 푸코는 마네에 관한 원고와 기독교 초기의 욕망을 다룬 '성의 역사' 제4권 '육체의 고백'의 사후출판을 거부했다.

'정신병과 심리학'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담론의 질서'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 푸코의 주요 저작 모두가 국내에 번역 소개됐으며, 최근에는 '비정상인들' '주체의 해석학' 등 그의 강의록까지 나왔다.

푸코의 개론서는 호록스, 메르키오르, 양운덕의 책을 참고하고, 보다 더 심층적인 접근이 필요한 이들은 이광래, 디디에 에리봉, 앨런 메길, 질 들뢰즈의 푸코 해설서를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그밖에도 '푸코의 맑스'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 '미셸 푸코, 죽음의 빛' '푸코읽기' '푸코와 페미니즘' 등이 번역됐다. 국내학자들의 푸코연구서는 '시칠리아의 암소'(김현),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윤평중), '푸코의 정치윤리'(박승규),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이영남) 등이 있다.

김 진 (울산대 교수·제22차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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