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불행한 점 중 하나는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나 지도계층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몽골의 징기스칸, 중국의 손문, 등소평 같은 군사 정치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인도의 간디 같은 정신적 지도자, 미국의 카네기나 빌게이츠 같이 자기의 부를 사회에 적극적으로 환원하는 경제지도자도 가지지 못했다. 영국의 귀족층, 미국의 상류층, 중국의 당 간부 자제들은 전쟁이 나서 최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명예로 여기지만 우리의 지도층은 그렇지 못했다. 중산층 이하의 건전한 시민의식에 의한 국가위기극복 노력에 비해 지도층의 그것은 초라했었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비롯한 집권사대부들은 대부분 도망 다니기 바빴지만 그래도 정신을 놓지 않은 재야선비들과 평범한 농민의병들의 희생에 의해 그래도 나라를 지켜나갔다. 구한말 때도 대원군, 민비, 고종 등을 중심으로 한 집권 세력들의 정책혼란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갑오 동학혁명, 국채 보상운동, 의병활동 등을 통해 그나마 한나라의 숨통이 쉽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음을 보여 주어 민족의 자존심을 보존해 주었다. 일제치하에서도 무능한 황제인 고종의 죽음이 3.1운동이라는 동양최대의 민중항쟁을 유발하였으며 이 운동의 주도층 역시 중산층이었다. 광복을 맞이한 해방정국에서도 몇몇 소수의 훌륭한 지도자를 빼고는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애국심에 불타는 열혈 청년이나 시민들의 건국을 향한 뜨거운 열기를 자기 개인의 정권쟁탈전에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6.25때도 이승만과 그 주변의 권력층들은 민족 상장의 아픔을 극복하는 일보다 정권유지에 더욱 신경을 썼으며 결국 민주주의의 근간인 헌법마저 수차 누더기로 개악하고 말았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을 민주정권으로 바꾼 힘의 근원은 이 땅의 젊은이들의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열망, 노력, 희생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 열매를 소중히 가꿔야 할 양 김씨의 정치 지도력과 그 업적은 극히 실망스러운 바 있어서 이제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마저 생각나게 한다. 우리에겐 왜 미국의 죠지 와싱턴 같이 종신대통령을 하라고 해도 사양한 초대 대통령이 없고 이승만 같이 죄없는 민중이 희생되어야만 물러나는 초대 대통령만이 있었을까. 우리에겐 왜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 같이 사심 없는 정치로 존경받는 개발 독재자는 없고 박정희 같이 평가가 엇갈리는 개발 독재자만 있었을까. 우리에겐 왜 중국의 등소평 같이 "죽은 후 내 시신을 북경대학 해부용으로 사용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화장하여 그 재를 대만 해협에 뿌려달라"고 유언한 지도자가 없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조상의 묘자리까지 옮기고 자기 자식들 하나 관리 못하는 지도자들 만 있을까.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 유고시 나는 서울의 대학생이었다. 그 즈음의 대학생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나도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독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보다는 막연한 해방감 같은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운구차가 지나가는 도로 연변에서 동원되지 않은 민중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추모의 정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매우 당황스러웠다.

 IMF 때 금모으기 예를 보더라도 우리 국민은 위기 시에는 뭉쳐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 시기를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과 협조하면서 경쟁하는 관계에서 낙오되지 않아야 하고, 완고한 이북과는 도우면서도 단속을 해야하고, 맏형 노릇을 좋아하는 미국과는 대등한 관계에서 자존심을 유지하면서 협조를 받아야 한다. 대내적으로는 나라의 근간인 교육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문화 사회적으로 격변하는 시기에 있다. 이러한 시기에는 참다운 지도자의 리더쉽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이러한 능력을 갖춘 지도자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꼭 대통령이라야 참다운 지도자가 되라는 법은 없다. 종교계, 문화계, 학계, 경제계에서도 이와 같은 지도자는 있다. 국민이 지도자를 만들고 지도자는 국민을 만든다. 그렇다 기왕에 치르는 이번 선거에서 누가 더 참다운 지도자인가를 잘 가려보자.

*12월의 경상시론 필진은 이종석 울산대 교수, 허문일 앞선치과 원장, 고영삼 울산발전연구원 도시사회연구실장, 김대환 경주대 방송언론광고학부 교수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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