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북구 약수마을

 

중봇등·대밭등 산줄기 감싸고 앞으로 동천 흐르던 시골마을
피부병 효험 있는 약수탕서 이름 유래…비옥한 농토도 지천
십리 떨어진 농소초등학교까지 신작로·철둑길 걸어서 통학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태어난 약수에서 자랐으며, 60년대 이후는 거기서 약 2㎞ 남쪽으로 내려와 제내(못안)에서 보냈으니 누가 고향을 물으면 그냥 '농소'라고 좀 어정쩡하게 대답하곤 한다. 농소지역이 지금은 북구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때는 농소면이었다. '농소'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고려 개국공신 박윤웅 장군의 식읍지로서 농사짓는 곳이라니 그만큼 비옥한 땅이 많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래도 오래된 장이 깊은 맛이 나는 것처럼 내 유년 회상의 주 무대이기도 하고, 가까운 친척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던 곳이 약수인 만큼 그곳이 고향이렷다. 여기서 떠올리는 고향 이야기는 자연히 50년대의 이야기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약수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북쪽으로는 '중봇등'과 '대밭등'이라고 불리는 산줄기가 동네를 감싸고 있고, 동쪽으로는 태백 준령이 만들어낸 골짜기들과 논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밭등이 끝나면서 그 위로는 '회양골'이 나오고 거기 있었던 외딴집의 적막함도 기억속의 한 장면이다.

다시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돌이 많았던 '돌티미'와 그 옆의 약수터에 걸쳐졌던 금줄의 잔영이 떠오른다. '약수'라는 동네 이름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는 약수탕에서 유래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집안 산소가 있는 '새양만리'가 나오고, 그 옆에 약수 사람들의 동산으로 이어지는 '정골'이 나오는데, 골짜기 따라 여름이면 소 먹이던 길이고, 겨울이면 많은 나뭇짐들이 오르내리던 길이 나 있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면 뒷들 논밭 도가리들이 펼쳐지고, '시북등' 지나 동대산쪽 '기백이재'를 만나게 된다.

남쪽으로는 '산막등'이라는 자연부락과 주로 언덕배기 야산과 논밭들이 널따랗게 차지하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냉거랑'이라 부르던 동천강이 흐르면서 주변의 비옥한 논들이 위치에 따라 '오리미들' '중봇들' '상봇들'로 불리며 약수 사람들의 주된 농장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너른 들녘도 동해남부선 철로와 나란히 이어지고 있는 신작로가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어서 동네와는 분리된 느낌이 나고 밖에서는 동네가 잘 안 보인다.

그 철길로 조개탄 때던 증기 기차가 약수를 지날 무렵이면 약간의 오르막이었음에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식식거렸고, 경주 쪽에서 내려오는 하행선 기차는 중봇등 산모롱이 돌때면 긴 기적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동네 사람들은 보통 위로 철길이 나있는 콘크리트 굴을 통하여 들로 나가기도 하고 철둑길 따라 바깥출입을 하곤 했는데, 그런 사정은 상전벽해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보통 거기를 '공굴'이라고 불렀는데 동네 안팎으로 구분하는 분기점으로 보았다. 그 공굴로 들어오면 동네는 작은 분지 같은 느낌이 드는데, 동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개울물을 경계로 위 깍단, 아래 깍단으로 구분되는 백여 호에 가까운 초가집들이 서로 밀치듯이 담장을 경계로 하면서 고즈넉이 자리 잡고는 많은 골목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약수는 비교적 살림살이가 다른 동네보다는 나았던지 여유있는 양반 동네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웃들의 삶은 다들 곤궁했다. 동산(洞山)의 송이버섯 이야기나 배밭 조성 등 새마을운동을 선구적으로 이끌어 대통령상을 타던 일화들은 60년대 후반부터의 이야기이고, 그때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약수는 다행히 6.25 전란에 결정적 피해는 없었지만 어른들이 생존에 급급하던 그때도 온통 놀았던 생각밖에 없는 걸 보면 나는 어지간히도 철없이 굴었던 개구쟁이였던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나를 '깔따구'라고 불렀다. 그 별명을 누가 지었는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름보다 훨씬 많이 들은 걸 보면 아마도 그게 내가 하는 짓거리들과 맞아떨어진 탓이 아닐까 한다.

'너는 그저 컸다.'라는 아버지의 표현 속에는 '병치레 안하고, 어른들한테 안 보채고 혼자서 잘도 노는 아이'로 해석되는데, 저녁에 밥숟가락 떨어지면 골아 떨어져 자고, 새벽같이 눈뜨면 또 마실을 나가는, 그래서 동네의 사건 현장에는 누가 오라고도 안했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비집고 다닌 아이가 바로 내가 아닌가 한다. 눈에는 자주 눈 다래끼를 달고, 무르팍에는 상처 딱지 떨어질 날 없었던 돌콩 만한 아이 때의 기억이 무에 그리 정돈될 수 있으리오마는 그래도 알 건 다 알았는지 끄집어 낼 기억이 참 많다.

'아무개 어른' 이니 '아무개 댁'으로 부르던 그 많던 동네 어른들은 이제 거의 다 산에 누워 계신다. 상쇠 잘치고 장구 잘 치시던 연오어른과 여천어른도, 고함소리 크시던 연지어른도 다 옛사람이고, 무섭게 호통치시던 계남어른과 큰선비로 존경받으시던 명촌어른, 활동력 왕성하시던 오장골어른, 대를 이어 면장을 지내시던 집안의 우산할배가 아마 대표적으로 위엄있는 동네 어른이었지 싶다. 그 외에도 나의 별명이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작은 채택'이라 부르며 놀리곤 하시던 동네 어른들과 형들은 이제 다들 돌아가시거나 흩어져버렸다.

동네 아이들 모두 농소초등학교가 있던 호계까지 십리 가까운 길을 걸어 다녔다. 버드나무 양쪽으로 늘어서고 자갈을 깔았던 그 길에서 가끔씩 차가 지나갈라치면, 맑은 날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 써야 했고, 비오는 날이면 흙탕물 튀기가 일쑤였던 등굣길은 장승배기라 불리던 신천에 있는 신작로와 철길의 교차로까지는 철둑길을 주로 이용했다.

춥디추운 겨울에 호주머니에 손 넣고 뛰어가다가 넘어졌을 때 그 쓰리던 아픔은 발등만 덮은 양말 속에서 떨던 발가락과 떨어져 나갈듯 아리던 귓볼과 함께 살을 에는 기억의 그림자가 매우 짙다. 이제 그 신작로든, 철둑길이든 걸어 다니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고, 4차선 도로 위에 수많은 차들이 질주하고 있다. 이렇듯 인걸만 간데없는 게 아니라 산천도, 구조물도 다 변해버린 게 고향 약수다.

이정호 길천 초등학교 교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