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찬 새벽 공기가 상큼하다.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어찌할 수 없다. 아내를 졸라 간단한 산행준비를 하고 천황산을 향해 가을소풍을 떠난다.

도심을 벗어나 능동산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어둑어둑 아직 등산로가 보이지 않는다. 동이 틀 때까지 차안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문득 "앞으로 이 가을을 몇 번 더 맞이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지나온 삶의 흔적을 돌아본다. 빛바랜 흑백사진이다. 옛날의 흑백 영상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만큼 여기 이 자리에 함께한 순간에 감사하며 절로 고개 숙인다. 가을이 넘어가는 길목에서 마음껏 이 가을을 누리며 오늘 하루도 삶의 보람을 만끽해야지.

어느새 주위가 밝아지면서 옆에 위치한 연수원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학생들의 기상시간이다. 아이들의 카랑카랑한 함성이 정겹다. 덩달아 힘이 솟는다. 동이 트고 희망이 솟는다. 타박타박 가을을 밟으며 우리의 산행도 시작이다. 맑은 가을바람에 밝은 가을 달까지 우릴 반긴다. 발끝에 전해오는 감촉 또한 포근하다. 밤새 놀다간 노루, 토끼 발자국을 밟으며 물씬 산내음에 취한다. 그리고 산정기를 흠뻑 받는다.

마음이 울적하고 세상이 하수상할 땐 무작정 집을 떠나 자연과 소통하며 산길을 걷노라면 세상이 환해지고 가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가쁘게 쉰 호흡 몇 번을 멈추며 걷다보니 어느새 능동산 정상이다. 한자리 포근하게 앉아 땀방울을 훔치며 배를 깎아 한입 가득 달콤한 향이 온 몸에 잔잔히 퍼진다. 올여름 혹심했던 더위가 이렇게 과일을 맛있게 영글게 했구나. 하지만 자연의 열기만은 아니다. 농민들의 정성과 땀의 결실이다. 황금 들판은 땀의 들판이다. 우린 아무 생각 없이 먹기만 한다. 배 값이 폭락해 농심을 울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노동의 열매라야 안락이 참되다는 것을 새삼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한 부분도 버리지 말고 맛있게 먹어야지.

어느새 광활한 억새평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가슴깊이 몰려든다. 그러나 왠지 쓸쓸한 계절의 맛이다. 무언가 허전하고 외로움이 몰려온다. 가을은 남자들에겐 외로움의 계절. 그러나 남자를 슬프게 하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야 한다. 뭐든 어떠랴. 고독도 즐기면 약이 되지 않겠는가.

도심에선 가을이라지만 여기 천황산 정상에선 초겨울 바람이 매섭다. 옷이 얇아 냉기가 엄습한다. 서둘러 하산이다. 연수원 가까이 이르니 어린 아이와 손을 잡고서 힘겹게 한 가족이 올라온다. '저 아이는 부모를 잘 만나 참 행복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등산은 어른이 됐을 때 인생의 거름이다. 혼자 걷고 뛸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스스로 한 발씩 헤치고 나가며 정상에 오르는 법을 깨우쳐 준다. 자연은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고 아이를 진실하게 만든다. 아이 스스로 길을 찾게 하고,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돌아오는 법을 배운다. 산을 통해 사는 법을 깨우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어른이든 아이든 모두가 다 배우는 학생이다.

일상이 나날에 푹 빠지다 보면 삶이 뭔지도 모르면서 떠들어 대기만 하지 않는가. 가는 가을의 언저리에 서서, 곱게 물든 잎새하나 주워 윗호주머니에 넣으며 나를 한 번 되돌아보는 좋은 선물을 제대로 받을 수 있어 하산길이 가뿐하다. 우리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한 번 만산홍엽에 파묻히고 싶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이동웅 전 울산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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