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인 규리가 학원에 들어온 지 1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먼저 입원한 또래 아이들이 규리를 놀려대어 학원에 오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부모로부터 전해 듣고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그것도 규리가 말을 못하고 있는데, 애 엄마가 달래는 과정에서 울며 그런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가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집단 놀림 때문에 학원을 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치원생에서까지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점으로만 짚고 넘어갈 사안은 아닌 것 같다. 어른들에게 퍼져있는 차별적 습관이 이제 유치원 아이까지 번져 있음을 증명하는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나중에 들어온 사람을 차별하고,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과 삼류대학을 나온 사람을, 높은 직위는 낮은 직위를, 잘사는 사람은 못 사는 사람을, 어른은 아이를, 남자는 여자를. 주위에 살펴보면 차별적인 것은 얼마든지 있다. 단지 차이점만 있을 뿐인 문제를 차별로 보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배려는 없고 불신의 악순환만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영국이 민주화가 될 때까지 80년이 걸렸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지금부터 100년 후로 잡는 사람도 있다. 현재의 유치원생은 이미 물이 들어 안되기에 그들이 늙어 죽고 다시 태어난 아이가 어른이 될 쯤에는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민주화는 한마디로 차별 없이 서로 존중하는 사회라고 할 것이다. 즉, 대통령이나 청소부나 대등하며 다만 차이성만 느낄 때 진정한 민주화가 아닐까 한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푸코는 유사성(동일자)과 상사성(타자)에 대해서 말한바 있다. 유사성은 본래적인 것, 원본을 전제하는 한에서 그 원본과의 가까움을 말하는 것이다. 그 원본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인가, 얼마나 그 원본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사성은 원본이 없는 것이다. 다만 각 존재들 사이의 같음과 다름이 있는 것이라 보면 된다. 그러니까 유사성은 a1, a2, a3" 위에 A가 있고 a1, a2, a3가 이 대문자 A를 얼마만큼 잘 모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런데 상사성의 개념은 대문자 A가 없고 그냥 a1, a2, a3" 만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사성은 서열과 수직적 차별이 생기게 되고, 중심권과 변두리라는 개념을 낳게 된다. 어떤 중심권이 있고 그 중심권의 소속감으로서의 존재개념 또는 원본에 대한 재현적 의미로 생각하게 해서 끼리끼리 뭉치고 차별을 만드는 경우이다. 유사성으로 해석한다면 서울과 울산 지역이 아니고 서울과 울산지방, 도시와 시골 같은 차별적 표현으로 되는 것이다.

 푸코의 이론에서 살펴본다면 유사성적 사회에서 상사성적 사회로 이동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국민의 성숙도와 민주화의 정도가 평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아진다.

 무차별이란 말은 본래 불교적 말이며 인간과 벌레도 똑같다는 내용에 이른다. 인간이 중요하다면 벌레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무차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좀더 나아간다면 무차별이란 곧 해체를 뜻하는데 해체라는 것을 과학적 용어로 보지 않고 형이상학적으로 본다면 해탈과 같은 뜻이 될 것이다. 즉, 해체는 자유스럽다는 의미와 자유자재라는 표현으로 된다.

 이렇게 볼 때 진정 민주화된 사회는 상사적 상황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다음은 차별이 없는 무차별적 상태, 그리고 해체되는 것 이러한 단계로 성숙해 나가는 순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유치원생까지 집단놀림을 당해야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지경에까지 와버렸다. 전제해본 해체의 경지까지 멀고도 먼 정점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전반에 걸친 우리의 현실은 어처구니없게도 미개인상태로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처지를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고쳐나가고 다듬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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