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서생포왜성(4) - 성벽

성곽이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견고하게 마련한 군사적인 방어시설물을 말한다. 한마디로 성은 적을 막기 위해 높이 쌓은 담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성벽은 성의 핵심시설이자 요체가 된다. 이에 어떤 국가나 축성자라도 방비의 승패가 달려있는 성벽을 쌓을 때에는 그 당시 최고의 기술을 적용하였다. 그래서 성벽은 한 국가나 특정시대의 성곽 축조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되며, 다른 나라 성곽과의 비교를 위한 기본요소가 되기도 한다.

전국시대 3대 축성 명인 가토 기요마사
서생포에서 새로운 곡선형 축조법 고안
‘일본 근세성곽의 박물관’이라 칭해져

흔히 우리는 일본성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활처럼 휘어지게 쌓은 성벽에서 찾는다. 곡선 모양을 한 일

▲ 서생포왜성의 분절형 성벽. 가운데 지점에서 한번 꺾이는 분절형태를 보여준다.
본 성벽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축조한 우리나라나 중국의 성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면 일본성의 대명사처럼 된 곡선 모양의 성벽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 해답은 의외로 서생포왜성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일본에서 돌로 만든 석축성이 등장한 것은 근세에 이르러서다. 물론 고대에도 석축성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스카(飛鳥)시대에 백제의 선진기술을 도입해 만든 소위 ‘조선식 산성’으로 주로 큐슈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후 중세에는 석성 대신 흙으로 만든 토성(土城)이 일본성의 주류를 이루었다.

석축성은 전란이 격화된 전국시대 초기에 등장하는데 기존의 토성을 보강하기 위해 성벽 하부를 돌로 피복하거나 성문과 같이 방어상 중요한 곳에 부분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석축성이 축조된 예는

▲ 청주 상당산성의 수직성벽.
간논지성(觀音寺城)이나 1576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쌓은 아즈치성(安土城), 도요토미의 거성(居城)인 오사카성(大坂城), 임진왜란 출진기지로 축성한 큐슈의 히젠(肥前) 나고야성(名護屋城) 등에 불과했다. 모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만들어진 성곽들이다. 하지만 이들 성에서는 아직 곡선 형태의 성벽은 보이지 않는다.

곡선형의 성벽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쌓은 서생포왜성에서다. 가토는 우리에게는 흉포한 침입자에 불과하지만 일본에서는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와 함께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3대 축성 명인으로 추앙받는다. 이 가토가 개발한 축조법이 바로 곡선형 성벽인데 부채를 펼쳤을 때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부채꼴 경사(扇句配)’로도 불리며 일본식 성곽 용어로는 ‘소리(反り)’라고 한다.

서생포왜성에서 나타나는 곡선형 성벽은 성벽의 바닥에서 최상부까지 전체를 완전한 원호(圓弧) 모양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성벽의 절반 높이까지는 완만한 기울기를 가진 직선형 성벽으로 쌓다가 그 위부터는 돌을 약간씩 돌출시켜 곡선형으로 만들고 최상부는 수직으로 세운 형태다.

▲ 구마모토성의 성벽 모습.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일본 성곽은 단순한 사선형(斜線形) 성벽으로 만들어졌다. 방어력 측면에서는 수직으로 쌓은 성벽이 훨씬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축조할 만한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성벽의 기울기는 돌의 가공 및 쌓는 기법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아직 자연석이나 깬 돌을 사용하여 비교적 낮은 성벽을 매우 완만한 물매로 쌓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벽을 눕혀 쌓으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만 가공되지 않은 성돌의 특성상 표면에 틈이 많이 생겨 전투시 적병이 쉽게 성벽을 기어오르는 단점이 있었다.

가토는 곡선 모양의 성벽을 고안함으로써 일본성이 가지고 있던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생포왜성에는 기존의 사선형 성벽이 어떻게 곡선형으로 발전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유구가 잘 남아 있다.내성(內城) 북쪽에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 두 형태의 성벽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 국내 왜성의 성벽 모습. 서생포 왜성과는 달리 가운데 지점의 분절형태 없이 직선형태를 보인다.
데 내측의 경우 임진왜란시에 쌓은 성벽으로 약 60도의 기울기를 가진 직선성벽이며 바깥쪽 성벽은 정유재란시 증축된 것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또한 내성 중심부 남측 성벽은 가운데 지점에서 한 번 꺾이는 분절형태를 보이는데 사선형 성벽이 곡선형 성벽으로 이행해 가는 중간단계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러한 곡선형 성벽은 같은 시기에 축조된 국내 왜성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가토가 쌓은 서생포왜성에서만 확연하게 나타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가토는 자신의 영지인 구마모토에 거성(居城)을 축조하면서 서생포에서 체득한 곡선형 성벽을 적극 채용하였다. 이 축성법은 ‘세이쇼류(淸正流)’로 불리며 그의 이름을 일본 전역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가토는 이후 에도성(江戶城)과 나고야성(名古屋城)의 축성에도 참여하였으며 그가 담당한 구간에는 어김없이 자신의 전매특허와 같은 이같은 모양의 성벽을 구사하였다.

당시 곡선 형태로 성벽을 축조하는 일은 최첨단 기술에 속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패권을 쥐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오사카성의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 세력을 포위하기 위해 그 주변으로 많은 성을 새롭게 만들게 된다. ‘덴카부싱(天下普請)’이라고 하는 이 대축성기에 만들어진 성 중에서도 자신의 아홉 번째 아들이 영주로 있는 나고야성이 포위망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1610년 도쿠가와는 19명의 다이묘(大名)에게 나고야성 축조를 명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경험한 바 없는 대중량의 6층 천수각(天守閣)이 놓이는 천수대가 가장 어려운 공사였다. 엄청난 하중에 견디면서도 성내에서 최고로 높게(19.5m) 쌓아야 하는 천수대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음으로 축성의 명수인 가토에게 맡겨졌다. 당시 현장은 여러 다이묘들이 인접해서 공사를 진행함으로써 서로의 축성기술이 교류되는 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토는 천수대에서 가장 중요한 모퉁이 성벽을 쌓을 때에 장막을 쳐서 다른 영주가 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서생포왜성에서부터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체득한 소중한 석축기술을 손쉽게 타가(他家)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이묘 중 유일하게 완성 후 자신의 이름을 천수대 성돌에 새겨 넣었다. 축성기술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이후 가토의 축성기술은 일본 전역으로 널리 퍼졌고 일본성의 상징처럼 되었다.

이와 같이 서생포왜성은 일본의 성곽발달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

▲ 이철영 울산과학대학(공간디자인학부) 교수

지 살펴본 곡선형 성벽 외에도 많은 요소들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발아되었거나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왜장 중에서도 축성에 큰 관심을 가졌던 가토가 7년 전쟁동안 자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주성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여러 성곽을 접하며 많은 자극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서생포왜성을 두고 ‘일본 근세성곽의 박물관’ 혹은 ‘일본성곽의 수수께끼를 거머쥔 표준화석’이라고까지 한다. 또 성벽수리 전문가들은 일본에는 서생포왜성과 같은 오래된 석축성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근세 초기의 모습으로 일본성을 복원할 경우 400여전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서생포왜성을 참고한다고 말한다.

이철영 울산과학대학(공간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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