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5일 오후 3시경.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던 엄준은 왜헌(일명 수비대)에게 끌려가는 기수의 허리를 붙잡았다. 왜헌이 그 손을 총대로 후려치자 엄준은 눈을 부릅뜨며 반사적으로 내려친 총을 잡으려 했다. "탕 탕 탕" 바로 앞에서 쏜 총알은 엄준의 34살 한창 나이를 모질게 앗아갔다. 연이어 퍼부은 일제의 흉탄은 3명의 목숨을 더 빼앗았으며 3명의 중상자도 냈다. 비분에 찬 한 청년이 왜헌의 총구 앞에 가슴을 헤치며 "여기도 쏘아라" 하자 그 기백에 눌려 총성이 멎었으나 통한의 울부짖음은 한동안 그치질 않았다. 주동자 7명을 묶어 왜헌들이 사라지자 중상자가 옮겨지고 가족이 있는 3열사의 시신은 그들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가족이 없었던 엄준 열사는 오랫동안 거적에 덮여 차가운 땅바닥에 그냥 버려져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뜻있는 청년 셋이 나타나 엄준 열사는 거적에 말려 지게 위에 올려져 황방산 어느 기슭에 쓸쓸히 묻혔다.

 2003년 4월4일. 병영 3·1운동 재현무대에서 엄준 열사는 어깨띠를 두른 출연자에 의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는 거룩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보고 있던 시민 모두 숙연해 보였다. 그러나 어쩌랴! 엄준 열사의 무덤을 찾는 이는 84년의 긴 세월 동안 단 한사람도 없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물어물어 찾아간 필자의 발걸음도 허사였다. 그를 묻어 주었던 세 분 마저 타계한 뒤니 잃어버린 열사의 무덤 위에 잡초와 나무가 우거져 자취 하나 없이 황량함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리라. 다른 순국자의 주검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국민의 경배를 받고 있어 엄준 열사에 대한 연민과 송구한 마음이 쉬 가시질 않았다.

 또한 91년 광복절을 기하여 엄준 열사께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대를 이어갈 자손이 없는 엄 열사의 경우 정부의 어느 소관기관의 창고나 캐비넷 속에 그 훈장이 사장되어 있다. 병영의 3·1 유족회 이름으로 엄열사의 훈장을 주시면 잘 단장된 3·1사당의 좋은 자리에 걸어놓고 빛내고 자랑할 것이라고 청원해 보았으나 상훈법 시행령 제 20조 훈장전수는 민법상 호주상속자에게만 전수토록 되어있다는 규정 때문에 줄 수 없노라고 통고해 왔다.

 가족이 없는 것이 허물이 되는가. 가족이 없는 자는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의로운 일을 하여도 보람이나 명예에 규제를 받아야 한다니 그런 법들이 옳은지 모를 일이다. 엄준 순국열사의 잃어버린 명예를 찾아줄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지. 재현행사보다 앞서 힘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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