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울산의 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나를 밝고 온화하게 비치는 가로등 불빛들로 어우러진 울산의 밤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 속에 스스럼없이 안겨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소박하고 따듯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이 울산이라는 도시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마도 이 도시에 나를 기억하고 있는 이웃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하릴없이 울산의 밤의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외부인 많다는 이 울산 어딘가에 나와 같은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이 도시를 따뜻하게 느낄 수 있는 이웃을 원하는 것은 아닐까? 이곳 울산뿐 아니라 현대도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국외자의 군집에 불과하다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사회 혹은 집단속에 있을지라도 완전히 그 속에 녹아 들어가지 못하는 국외자의 군집이 바로 현대도시사회를 성립하게 하는 기반이라는 것이다.

 에드가 알란 포우가 100여년 전에 쓴 "군중속의 사람"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근대적 도시 속에서 형성되는 군중을 묘사한 최초의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는 도시의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면서도, 혼자라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도시의 번화가를 아무 목적도 없이 떠밀려 다니는 노인이 등장한다. 요즈음 왠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노인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 노인이 어느새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19세기말 근대사회가 막 태동하려는 시기를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갈망했던 공동체사회에 대한 포우의 갈망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것은 왜일까? 가정과 직장이 분리된 현대사회에서 이 둘과는 별개의 제3의 공간이 일상생활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도시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군집, 즉 군중이라고 한다. 익명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도시의 공간이다. 현대도시의 인간은 이러한 익명성을 확보하는 것에 의해 도시특유의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공간 속에서는 어떠한 인간이라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동시에 타인의 시선 속에 존재하면서도 익명성을 띤 군중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군중속의 한 사람으로써 금방 잊혀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성립하는 것이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군중 속에서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전혀 구속받지 않는 반면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아무런 기반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익명성이 가져다준 자유로움을 대가로 현대인들은 고독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부정적인 생각이 아닌가하고 자신에게 반문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중세 신분사회로부터 벗어나 개개인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현대사회의 이면에는 이해관계와 타산, 그리고 합리화된 이기주의를 사회원리로 하는 냉정함과 그로 인한 현대인의 고독이 나를 무겁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로 돌아가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이해관계에 밝고 합리적인 인간만이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이해타산에 약하고 조금은 비합리적이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제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도 인정받을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불과 5%밖에 안 되는 노인들의 권리도 존중되며, 자동차문화가 중심인 사회에서 아이들이나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도 배려하여 안전한 인도가 잘 설치되어 있는 도시공간을 형성하고, 집을 나서면 숲이 보이는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나를 포함한 이 지역마을의 이웃이 함께 고민하고 함께 호흡하는 그런 생동감 있는 사회를 꿈꾸고 있을 뿐이다.

 내가 사는 울산이 그런 따뜻한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따뜻함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살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속에서 비로소 한 인간의 실재성은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 하루는 따뜻한 마을 만들기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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