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저승사자가 찾아온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 갈수 있는

그런 후회없는 삶을 살고 싶다

▲ 이규복 시인·재경 울산향우회 부회장
가을 하늘은 유난히 청명하고 푸르다.

10년간 암 투병을 하시다 가을하늘로 걸어가신 나의 아버지. 추석을 열흘쯤 앞두고 전화를 하셨다. “복아! 니 보고싶데이…. 당장 울산오면 안되나?” 아버지의 자식 그리움이 담긴 전화 목소리에 추석 때 내려 가겠노라고 말씀 드리자, “복아! 내 이제 죽는다… 죽으면 못 보는데 한번 오너라….” “예….”

이렇게 통화를 끝낸 며칠 뒤 세상과 이별하신 나의 아버지. 정신없이 장례를 치루고 난 지금 너무나 가슴이 휑하다. 큰 바위가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은 중압감, 허무함, 무기력증…. 하루 일과를 끝내고 귀가를 할 때면 말없이 흐르는 눈물이 훔쳐내어도 훔쳐내어도 멈추질 않는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나를 찾았던 아버지는 아마도 그때 생명의 끈을 놓는 시간을 예견하신 것 같다.

지난 겨울, 거의 누워서 지내시느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보고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아서 열흘간의 휴가를 내어 간병인 아주머니도 마다하고 간호를 한 적이 있다. 하루 세끼 식사를 챙기고, 죽도 끓여드리고 하면서 50년 세월 동안 못 다 나눈 정을 조금은 나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기거하시는 방에서 이상하게 냄새가 나 구석구석 청소를 하다 보니 용변 보신 내의를 옷장 구석에 숨겨 놓으신 걸 발견했다. 모두 다 꺼내 빨아 널고 조용히 아버지 곁에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

“아버지! 서울에서 둘째 아들이 내려와 옆에 있으니 행복하지요?” 물끄러미 쳐다보시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아버지! 어린 시절 우리 형제들 키우실 때 기저귀 다 갈아 주셨지요?” “그럼, 그럼.”

“아버지! 이젠 아버지가 힘드셔서 용변을 보셔도 자식들이 다 해드릴테니 부끄러워 마시고 용변 보신 내복은 꼭 내놓으세요….”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비닐봉지에 숨겨 놓으신 내복 몇 개를 더 내놓으셨다.

세탁을 마치고 창가에 훤히 비치는 달을 보며 아버지 옆에 누워 ‘내년 겨울에도 이렇게 아버지랑 함께 누워 있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잠겨있는데 내가 잠이 든 줄 알고 두꺼운 이불을 턱밑까지 덮어 주신다.

그렇게 잠깐 잠이 들었다.

“복아! 복아!” 나를 부르는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 먼저 잠이 든 죄송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그러세요?”

“대문 밖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다. 아버지 못 간다고 해라!”

깜짝 놀라 밖을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아무도 없는데요?”

“지금 마당으로 들어와서 방문 앞에 서있지 않느냐! 아버지 못 간다고 해라!”

나는 직감적으로 아버지가 보는 것이 드라마나 어린 시절 구전으로 들어보던 저승사자라고 생각하고 아버지 들으시란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희 아버지 오늘 못 가신다고 하니 제가 더 모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오늘밤은 그냥 가세요!”

십여분이 지났을까. “복아! 방금 검은 옷 입은 사람 대문 밖으로 나갔다. 이제 자자!”하시며 편안히 잠이 드셨다.

아버지가 좀 더 사셔서 못다 한 효도를 하고 싶은 나의 소원을 저승사자가 들어준 셈이다.

그 후 8개월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언젠간 아버지를 모시러 왔던 저승사자가 나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찾아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버지처럼 “못간다… 못간다…”하지 않고 얼른 이승에서의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 나설 수 있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살아생전 자식들에게 성실·근면하고 면학하여 진리의 소유가 행복이며 아생연후 한 뒤 봉사하라고 일러주신 나의 아버지! 삼오제 지난 다음날, 가을비가 온통 그리움의 비가 되어 내렸다. 인생의 아름다운 희노애락의 무지개가 저의 인생 언덕에 뜨면 아버지! 당신의 영혼이 일곱색깔 무지개 너머 찬란한 태양처럼 떠 있을 것입니다.

이규복 시인·재경 울산향우회 부회장

※외부 기고는 본보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 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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