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과 보전은 공존 어려운 양날의 칼

생계의 근거지를 내준 주민 희생으로

우포늪은 본래의 제모습 되찾고 있어

▲ 양성복 수필가
우포늪은 경남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 등 3개면, 14개 마을에 걸쳐 원시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내륙습지로 둘레가 7.5km에 담수면적은 약 2.3㎢에 달한다. 우포늪은 아무리 깊어도 사람의 키를 넘는 곳이 거의 없다. 장마철 홍수기에는 수심이 5m에 달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1~2m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1918년에 만들어진 지도에는 낙동강 하류에 이런 늪이 98개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농토로 개간되거나 쓰레기 등으로 메워져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가치관이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게 마련인데, 당시로는 쓸모없는(?) 늪을 메워 농경지로 개간하는 것이 식량증산으로 국민의 식생활에 크게 기여하는 정책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 때인 1930년대에 이르러 지금의 우포늪 동쪽에 대대제방을 축조하고 대대들을 개간해 식량증산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우포늪은 3분의 1가량 줄어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포늪 주변의 가항늪, 팔락늪, 학암벌 등 10개의 늪이 무분별한 개발과 농경지의 잠식으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 1990년대 중반 목포늪 부근에 생활 쓰레기 매립장이 조성되다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현지 주민과 정부 및 환경단체들의 갈등이 극심했던 시절의 이야기 한 토막.

당시 우포늪 인근의 소목마을 주민 11가구와 사지포마을의 1가구 등 12가구는 대대로 우포늪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수면보호법이 바뀌었다며 그물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포늪은 계절에 따라 어로방법이 달라지는데 여름철엔 정치망을, 겨울엔 자망으로, 그리고 가래라고 하는 대나무 깔때기 모양의 통발을 사용하는 독특한 전통방식으로 고기를 잡았다. 물론 아무나 고기잡이를 할 수 없었다. 허가 받은 가구만 어로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외부인은 낚시는 물론 어떤 채취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제 때 만들어진 내수면 어업법엔 정치망이란 어구가 없다하여 당국에서는 보편화된 정치망 어로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는 이의 합법화를 명목으로 각 5틀의 정치망만 허가를 해 주면서 추가로 설치된 정치망의 철거만 명령했다. 그 동안 현실에 맞게 법을 정비하고 적용하지 못한 책임은 전혀 없었다.

사실 정치망은 갈수기 때 늪 속에 묻히면 천하장사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그 무게가 엄청나다. 그래서 주민들은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날 때까지 한두 달 철거를 유예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내수면보호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모조리 벌금 100만원과 함께 고발당하는 날벼락을 맞았다. 판사 앞에 불려나간 어민들이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자, 판사는 보상은 얼마나 받았느냐고 물었다.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하자, 그 사실을 확인한 판사는 억울하게 보상도 받지 못한 어민들이 불쌍했던지 벌금 없이 모두 방면했다. 그 후 어민들은 벌금을 물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며 아무도 보상을 받자고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이용과 보전이란 양날의 칼처럼 서로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 조상 대대로 우포늪을 생계의 근거지로 삼아온 지역주민과 지구상의 중요 생태환경을 보전하려는 환경단체들 간의 끝없는 대립과 갈등은 여러 번의 공청회와 대화를 통해 피차가 상생하는 접점을 찾았으나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든든한 우군도, 단결된 구심점도 없이 시대의 대세에 역부족인 현지 주민들의 많은 희생 속에 환경부는 1997년 7월26일 우포늪을 생태계보전지역 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제협약인 람사협약에 등록됐고, 1999년 8월9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자연생태계보전지역과 람사습지로 등록된 이후 정부와 환경단체들의 지속적인 보호로 훼손의 손길이 줄어들자 우포늪은 빠르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우포늪도 앞으로 300년 정도면 늪으로서의 생명을 다하고 각종 퇴적물들이 늪에 쌓여 소택지화 할 것이라 한다. 대자연의 순환을 거스를 수야 없지만 우리 세대에 주어진 보전책임은 늪이 존재하는 한 다해야 할 것이다.

양성복 수필가

(그 옛날 울산토박이들은 태화강을 ‘태홧강’이라고 발음합니다. 맑고 아름다웠던 그 ‘태홧강’은 울산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칼럼 ‘태홧강’은 울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 살면서도 가슴 한 켠에 울산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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