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대준 경동도시가스 지속성장팀
약 2년 전 출근길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생긴 일이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거기에는 출근을 위해 다급히 준비한 듯한 젊은이, 학교를 가기 위해 피곤한 눈을 방금 비벼낸 듯한 학생, 정체 모를 목적을 위해 의복을 차려 입은 어르신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정류장에 도착했고, 필자는 다행히 자리에 앉아서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조금 전 버스정류장 맨 뒤에서 여유롭게 전화통화를 하던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내 앞에 서서 은근히 일어서기를 바라며 눈치를 보내고 있었다. 어제 야근으로 몇 시간을 채 못 잔 나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아주머니는 얼마나 피곤해서 나에게 이렇게 눈치를 주는 지가 의심스러웠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바이지만, 복잡한 러시아워 때 일반석 젊은이 앞에 서서 은근히 일어서기를 바라며 눈치를 보내는 노인은 ‘늙은이’ 같고, 젊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해도 곧 내린다거나 서 있는 것도 운동이라며 사양하는 노인은 점잖은 ‘어르신’ 같다는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늙은이’와 ‘어르신’은 노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다른 사회적 계층으로 다시 한 번 분류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는 노인을 ‘시니어 시티즌(Senior Citizen)’이라고 부른다. 시니어라는 어휘에는 풍부한 경륜이, 시티즌이라는 말에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그들은 65세에서 75세를 ‘영 올드(Young Old)’ 또는 ‘활동적 은퇴기(Active Retirement)’라고도 한다.

인생 100년을 사계절에 비추어 25세까지는 봄, 50세까지는 여름, 75세까지는 가을, 100까지를 겨울에 비유한다. 은퇴 이후는 인생의 가을과 마찬가지다. ‘어르신’ 처럼 행동하면 인생의 황혼이 단풍처럼 곱게 비쳐지지만, 주책없는 ‘늙은이’로 살면 비에 젖은 낙엽처럼 추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필자의 하얀 종이에 까만 잉크의 흐름에 따라 평가를 받을 대상은 아니다. 분명히 노인은 지혜롭다. 이는 인지과학적 연구를 통해서도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노인의 지혜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의 지식이 교과서라면, 노인의 지혜는 교과서를 잘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참고서다. 건강관리만 하면 노인도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 담배와 술을 즐기며 인생을 소모적으로 사는 웬만한 젊은이보다 더 건강한 노인도 많다.

그러나, 노인에 대한 접근을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유지하던 효(孝)라는 관점으로 단순화해서 노인은 존경 받아야만 하며, 이러한 순리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서도 모두에게 질서화 된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

자칫 이러한 질서 속에서 노인은 존경 받아야만 한다는 획일적인 정서의 교감은 더 큰 화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어차피 세태가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졌으므로 젊은이들의 가치관의 선택에 의해서 ‘패륜’이라는 못할 상황 또한 양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말이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은 542만명이나 된다. ‘어르신’과 ‘늙은이’로 나누면 그 비율은 어떻게 될 지 궁금하다. 인생 칠십은 옛말이고, 100세 시대가 현실화 됐는데도 여전히 65세가 되면 노인취급을 당한다. 전철을 공짜로 타고 고궁이나 국·공립박물관은 무료로 들어간다. 기초생활보장법이나 국민연금법의 노인 기준은 60세부터다. 지난해 열린 ‘고령자 심포지엄’에서 노인의 기준을 65세에서 75세로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노추를 보이며 ‘늙은이’로 살아 갈 것인가, 당당하게 ‘어르신’으로 존경 받고 살 것인가는 건강한 정신에서 나온다.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시에서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고 노래 했듯이 육체적 연령 보다 중요한 것이 정신적 젊음이고 타인을 위한 배려다.

지금 이 글을 읽은 순간에도 막연한 거부감이 든다면, 본인도 노인(老人)인지 한 번 쯤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정대준 경동도시가스 지속성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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