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시작"과 함께 희망과 기대속에 맞았던 한해도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뒤돌아 보면 좋은 일보다 기억하기 싫은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멀리 남의 나라 일은 접어두더라도 부실기업의 공적자금이 7조원이나 새나갔다는 소식에는 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가. 많은 서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돌반지, 결혼반지까지 내 놓으며 "금모으기 운동"을 해서 모은 돈이다. 기업을 살리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공적자금이었다.

 그런데도 부실기업주들은 그 돈으로 호화쇼핑을 일삼고 그것도 모자라 해외로 돈을 빼돌렸다. 4개 부실기업 8명의 대주주가 해외로 빼돌린 돈은 무려 5천억원에 달한다. 은행의 빚더미를 앉고도 그들은 해외를 돌며 카지노나 골프장에서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국내 백화점에서도 20억원어치의 물품을 카드로 결제했다니 국민의 세금이 그들에겐 "눈먼 공돈"이나 다름 없었다. 한마디로 몰염치요, 파렴치한 행위다. 도덕적 해이의 극치를 보는 듯해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기가 막히는 일이 어디 그 뿐이랴. 부실기업 임직원들이 재산을 빼돌리고 있을 때 관리 감독청에서는 뭘했는가.

 감사원에 따르면 관리감독 소홀로 6조원 이상의 공적자금 부담을 가중시켰고 불요불급한 자금 투입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가 11조원대에 달한다고 한다. 일이 이 지경에 있어도 관리 감독청은 여전히 남탓만 하고 있으니 가관이다. 상당수 공직자들이 부실에 대한 책임 앞에서는 변명하기 바쁘다. 생색낼 때는 언제고 문책 운운하니 저마다 고개를 돌리며 꼬리를 내린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행위에 배신감만 들 뿐이다. .

 이제 IMF체제후 만 4년째를 넘겼다.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구조조정을 하면서 경기회복에 안간힘을 쏟았지만 우리네 주머니 사정은 별반 나아진 게 없다. 경기가 회복된다는 소식보다 더욱 어려워 진다는 통계만 쏟아진다. 그 많은 공적자금을 엉뚱한데 쏟아 부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 와중에서도 가끔씩 용기와 희망을 주는 뉴스가 있어 위안이 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출범도 그중 하나에 속한다. 완벽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출발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권 유린을 보고 겪어 왔던가. 불법체포, 감금, 고문 등 기억하기 조차 싫은 기본권 침해에도 말 한마디 못한 때가 있었다. 권력의 힘에 눌린 약자의 수모로 가슴에 한이 되어 살아 온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성차별이나 장애인차별 또한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엊그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들이 울산구치소를 찾았다. 지난달 16일 음주운전에 따른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장 유치처분을 받고 구치소에 수감된 구모씨가 이틀만에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유족들로부터 이 사건을 접수받고 현장조사에 나섰던 것이다. 당장 어떤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지는 않지만 유족들은 이렇게 찾아와 조사해 주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마음을 쓸어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총체적 부실"이라는 단어를 써왔다. 그리고 해결책도 여기저기서 내어 놓았다. 그런데도 여지껏 한 번도 시원한 결말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고질병은 따질줄만 알았지 "몸통"을 규명하고 책임을 지우는데는 관대한 점이다. "깃털"의 희생양을 내세워 면죄부를 씌우고는 "세월이 약"이라는 망각의 해법을 택해 슬그머니 시간속에 묻어 버린다. 그동안 너무나 익숙해진 해결 방식이다.

 인권위원회가 현장을 찾듯이 우선 진실부터 규명하는게 순리라고 본다. 취약하고 푸대접 받는 약자의 인권을 찾고 공적자금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구조적 부조리에서 서민들을 보호하려면 정확한 진실 규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철저히 책임을 물어 실책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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