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이야기를 입히다-스토리텔링 울산 : 34 이규정과 신간회

▲ 부산 KBS 제작진이 백운의 행적을 찾기 위해 지난 주 울산을 방문, 백운이 신간회 창립 때 모임을 가졌던 북정동 3·1회관 주위를 촬영하고 있다.

부산 KBS에서 백운(白雲) 이규정(李圭正)의 삶을 이번 주 방영한다. 백운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부산 용호동 염전을 사들인 후 이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1948년에는 대한염전협회를 만들어 스스로 회장이 되는 등 부산의 경제 발전을 위해 크게 헌신했던 인물이다.

부산 KBS는 지난 주 북정동 3·1회관과 달동의 울산공고에 들려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그의 활동을 촬영해 갔다.

부산 좌천동서 태어나 월성 이씨 종가 있는 울산에서 청장년기 보내
정미소 사업 성공한 뒤 농촌계몽운동 펼치고 신간회 창립에도 앞장
1933년 경남도의원 당선…백방으로 노력해 울산농고 설립 견인
1930년대 말 만주로 떠났다가 광복 후 부산으로 돌아와 정착
일제강점기 울산 위해 청춘 바쳤지만 지역민에 잊혀진 비운의 인물

백운은 이처럼 부산에서 존경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 대부분을 울산에서 보내면서 신간회 창립과 울산농고(울산공고 전신) 설립에 참여하는 등 울산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선각자였다.

월성 이씨의 후손인 백운은 1899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울산에 오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월성 이씨 종가가 울산 다운동 척과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인연으로 울산에 오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한다.  

▲ 울산농고 제1회 졸업생들은 일제강점기 울산농고 설립에 앞장섰던 백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졸업앨범에 백운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그가 울산으로 와 성남동 구 주리원백화점 자리에 정미소를 차렸을 때는 1914년 25살 때였고 이후 10여년이 지난 1925년이 되면 이미 울산지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각종 사회 운동을 벌인다.

이 무렵 그가 울산에서 펼친 사회사업이 농촌계몽운동으로 1927년 울산의 각 지역을 돌면서 울산농보(蔚山農報) 발간과 관련된 취지를 설명하는 등 농민들의 권익신장에 힘쓴다.

신간회 울산지부 창립에 앞장선 것도 이 무렵이다. 울산에서 신간회가 창립된 것은 1928년 3월로 이때 백운을 비롯한 울산청년들이 북정동 3·1회관에서 창립식을 가졌다.

신간회 울산지부는 16명의 울산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했는데 부산 구포 3·1운동을 주도한 후 울산에 와 처음으로 서양 의술을 펼쳤던 양봉근씨가 임시의장으로 사회를 보았다. 이외에도 발기인으로는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자로 청년운동을 열심히 펼쳤던 성세빈, 강철, 김활천이 있고 이규명, 유창식, 황선운 등 울산지역유지들도 참여했다.

3·1독립운동 후 조선 청년들 사이에 일어났던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일제의 수탈을 막기 위해 전국 단위로 조직되었던 신간회는 항일을 앞세웠기 때문에 일제는 이 단체 구성을 처음부터 금했다.

따라서 백운을 비롯한 조형진, 양봉근, 박병호 등 울산의 청년 지도자들이 1927년부터 사전 모임을 여러 번 가졌지만 일본의 간섭으로 여러 번 연기된 끝에 1928년 창립을 본 것이다.

신간회는 이후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울산 청년들을 대상으로 항일운동을 열심히 펼쳤나갔다. 백운이 울산 현안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사회 운동을 벌인 것은 1933년 울산에서 도의원에 당선되면서다.

도의원으로 그가 펼친 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울산농고 설립이다. 백운이 울산농고 설립을 벌일 때만 해도 울산의 교육환경은 열악했다. 일제는 이미 이 무렵 울산에 ‘1면 1교’를 추진해 매년 2천여 명의 보통학교 학생들이 울산에서 배출되었지만 이들이 진학할 상급학교가 울산에는 없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야학을 다니거나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백운이 울산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깨닫고 울산농고 설립을 추진한 것은 1933년 도의원에 당선되면서다.

당시 동아일보를 보면 백운은 1933년 6월 울산출신의 김상희 도의원과 함께 경남도의회에서 갑종농업학교 설립 안을 통과시킨 후 울산군청에서 군수와 지방 유지들을 참석시킨 가운데 울산에 갑종 농업학교를 세울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회장은 김상희 도의원이, 부회장은 당시 울산의 최고 부자였던 김좌성씨가 선임되었고 백운은 김활천과 함께 간사를 맡아 실무를 보게 되었다. 김상희는 양산 출신으로 도의원이 되기 전 울산에서 민우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경남도가 울산농고 설립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백운을 비롯한 울산유지들은 1934년 2월 당시 2년제였던 울산농업보습학교를 갑종농고로 승격시켜 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경남도가 난색을 표하자 백운은 김상희 회장과 함께 경남도 학무국장을 직접 찾아가 울산농고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1937년 울산 농고가 세워지게 된다.

당시 백운이 울산농고 설립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하는 것은 졸업 앨범에서 알 수 있다. 울산농고 제 1회 졸업 앨범에는 첫 페이지에 농고 설립자 두 명의 사진을 크게 실었는데 이 중 한 명이 김좌성이고 다른 한명이 백운이다.

도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군민들을 위한 각종 지역사업도 많이 챙겼다. 1935년 당국이 울산비행장을 철거하려고 하자 군민들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이 무렵 대구에 비행장이 들어서기 때문에 울산에 비행장이 따로 필요가 없다면서 철거계획을 세우자 울산군민들이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외에도 그가 벌인 사업으로는 정자항 축항이 있다. 일제강점기 정자항은 울산어민들의 소득 원천이었지만 제방시설이 좋지 않아 어민들의 불편이 컸다. 따라서 그는 도의원 당선 직후 정자항을 방문하고 지역 대표 6명과 함께 경남도청을 찾아가 도지사와 산업국장을 만나 정자항 축항을 요청해 이를 성사시켰다.

백운은 이외에도 1936년에는 울산에 들린 정무총감을 만나 각종 지역 현안을 건의 하는 등 지역 사업 추진에 앞장섰다.

백운이 이처럼 지역현안 해결에 앞장 설수 있었던 것은 울산에서 벌인 정미업의 성공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백운은 경남도의원이 되기 전인 1931년 이미 도정한 많은 쌀을 일본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1931년 12월 14일 동아일보는 ‘울산이 매년 50여 만 석의 쌀을 장생포항을 통해 일본에 수출하고 있는데 이중 이규정과 박석룡 두 사람의 공장에서 도정해 내는 쌀이 연간 1천석이나 된다’고 보도하고 있어 이 때 이미 백운이 울산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울산에서 청년운동과 교육사업에 앞장섰던 백운이 30년대 말이면 만주 장춘으로 가게된다.

이 사실은 백운과 함께 울산에서 신간회 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양봉근씨의 일대기에 나타나고 있다. 이 책에는 양씨의 아들 득우씨가 장춘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더니 백운이 울산에서 사업에 실패한 후 장춘으로 와 3천여정보의 임야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서 청년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울산에서 번창했던 그의 정미소 사업이 일순간 망한 것은 장생포항에서 쌀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배가 침몰했기 때문이다.

백운이 만주에서 부산으로 온 것은 해방 무렵이다. 이종철(69) 현 부산 남구청장이 백운의 아들로 만주에서 태어나 이 때 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왔다. 이후 용호동 염전사업의 성공으로 부산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그는 1977년 타계했다.

부산에 있는 동안 백운은 울산농고 출신들의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았다. 이종철 남구청장은 “아버님이 부산에 있는 동안 울산농고 설립을 고맙게 생각하는 울농 출신 학생들의 예방을 자주 받았는데 특히 아버님을 평소 존경했던 이후락씨가 새해가 되면 항상 집으로 찾아와 세배를 드렸고 울산농고 개교 30주년 때는 직접 집으로 차를 갖고 와 아버님을 태우고 울산기념식장까지 모시고 갔다”고 말한다.

백운은 일제강점기 울산을 위해 이처럼 많은 일을 했지만 그동안 울산에서는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지금까지 울산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2007년 울산정책연구소가 발간한 <울산의 독립운동사> 중 신간회 창립과 관련된 한 줄 뿐이다.

그가 울산에서 산 기간은 20여년 밖에 되지 않지만 길지 않은 이 시간 울산의 선각자로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을 펼쳤고 지역민들을 위한 교육운동에 기여했다. 늦은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울산이 그의 행적을 세심히 찾아내어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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