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황금물결을 자랑하던 들판이 비었습니다. 어느새 가을걷이가 끝났나 봅니다. 매번 이맘때면 잔뜩 배를 부풀린 보자기 너 댓개가 내게로 왔습니다. 어머님의 무명보자기이지요. 질끈 묶은 보자기를 풀면 흥부 박속처럼 많은 것들이 쏟아집니다. 콩 종류와 참깨, 들깨는 기본입니다. 태양초 고춧가루, 튼실한 머드러기만 골라 담은 대추와 단감이 들어 더 묵직합니다. 짐을 꾸리다 여유가 있다 싶으면 다시 풀어 꽉 채웠을 테지요.

어머님의 보자기는 늙은 호박 두세 덩이도 포개어 쌀 수 있으며 단물나는 무와 속이 꽉 찬 배추도 얼마든지 담깁니다. 담장 위에서 햇빛 머금고 익은 꽃호박도 수줍게 얼굴을 내 밉니다. 가방이라면 이런 농익은 생명체들을 듬뿍 넣을 수 없습니다. 가방 모양에 맞출 수는 없으니까요. 보자기는 둥글든 모가 난 것이든 생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포용력이 있습니다.

어머님 돌아가신 후 이제 형님의 보자기가 내게로 옵니다. 나달나달 닳은 무명 보자기 대신 알록달록한 보자기를 풉니다. 보자기 속도 진화를 했습니다. 참깨와 들깨 대신 참기름 들기름이 들어 있습니다. 팥이 아니라 팥고물 듬뿍 얹은 인절미가 있네요. 무 대신 총각김치 두통이 보자기에 싸여서 옵니다. 싸다, 매듭짓다, 묶다, 이다, 풀다 로 이어지는 글들도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나옵니다. 밭고랑에 아낌없이 바친 형님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내용물은 조금 달라졌지만 묵직한 사랑은 어머님의 보자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단단히 매듭을 지었지만 한쪽 끝을 잡아당기면 쉽게 풀리는 것도 꼭 같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상들은 온갖 보자기를 사용 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강보에 싸입니다. 혼례를 치를 때에는 사주보와 폐백보가 오가고 함을 싸는 함보도 있습니다. 책보나 밥상보 이불보는 요긴한 생활용품이었지요. 이것저것 짐을 옮기는 수단으로 보자기만한 것이 없습니다. 구부리고 잘라서 넣어야 하는 가방은 쓰임새도 제 각각입니다. 한번 쓰고 버리는 쇼핑백이나 비닐 주머니도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가방과 달리 모양과 크기, 용도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너그럽게 감싸는 보자기야말로 아름다운 쓰임의 표상입니다.

거실에서 내려다보니 텅 빈 구영 들판이 보자기를 펼쳐 놓은 듯합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 할 줄 아는 보자기 같은 넉넉한 품을 지닌 사람이 그리운 계절입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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