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운문사를 지나 암자로 갔습니다. 봄이면 꽃을 보러 자주 들렀던 곳이지요. 그런데 이 겨울에도 꽃이 소담스레 피었네요. 볏짚에 열십자로 묶인 메주가 꽃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요사채 처마 밑에 대나무 시렁을 만들어 매달아 놓은 메주는 오후의 햇살에 꾸덕꾸덕 말라갑니다. 호거산 자락을 타고 온 바람이 한몫 거들고 있습니다. 스님은 마당 가득 야생화 가꾸는 솜씨로 메주를 빚었네요.

김장이 끝나면 집집마다 메주를 쑤었지요. 콩 삶는 구수한 냄새는 담을 넘나들었습니다. 메주는 겨우내 처마 밑과 온돌방을 오가며 희고 푸른곰팡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구들을 떡하니 차지하기도 했고 때론 나랑 같이 목화솜 이불을 덮어가며 긴 겨울을 함께 났지요. 어머니는 곰팡이를 더덕더덕 붙인 메주를 들여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습니다. 쿰쿰한 메주 냄새를 맡으며 동생들이랑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고 뜨거운 김이 나는 찐 고구마를 먹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서서히 발효가 되어 갔던 것이지요.

콩을 푹 삶아 으깨고 짓이겨 밟아야만 메주균이 강림한다는 것을 요즈음 아이들은 모릅니다. 콩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시켜야 간장이 되고 된장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줄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으깨진 콩이 서로 한 덩이로 뭉쳐 익고 또 익어가는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아이들에겐 발효의 시간도 당연히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날내가 나고 울뚝불뚝 제 기운을 주체 못해 솟구쳐 오르기도 합니다.

길일을 골라 장을 담그는 날, 독에 메주를 깔고 소금물을 부은 후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불붙은 숯과 붉은 고추를 넣었습니다. 장독에 금줄까지 친 후에는 정화수를 떠 놓고 두 손 모아 빌었습니다.

“메주가 오드끼(오듯이) 장맛도 참하게 오시소오”

메주는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 세상의 맛을 통째로 가져옵니다. 실로 대단한 일이지요. 햇빛과 물과 바람이 익힌 오래된 장맛은 살아가는데 때론 힘이 됩니다.

암자의 대나무 시렁에 주렁주렁 걸린 메주를 향해 합장을 합니다. 처처시불(處處是佛), 곳곳에 부처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했으니 불성 담긴 메주를 향해 몸을 한껏 낮춥니다. 나한전 부처님들이 햇볕을 받고 앉아 그윽이 내려다보는 것 같습니다. 메주가 오듯이, 묵은 장 맛이 그렇듯이 나 또한 곰삭은 맛을 내고 싶다고 원을 세웁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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