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줄어들면 저절로 행복해져
더 많이 가지려 애쓰기 보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 장만석 울산시 경제부시장

가설은 검증되지 않는 논리다. 그래서 때로는 궤변(거짓인 주장을 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논법)이 되기도 하고 혹세무민(세상 사람들을 속여 정신을 홀리고 세상을 어지럽힘)의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과학적 증명조차도 가설에서 출발하고, 우리가 접하는 그럴듯한 이야기는 대부분 가설이니,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온통 가설이 아닐까.

가설1. 긍정. 고등학교에 다니는 처조카한테서 문자가 날아왔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의 ‘시계 거꾸로 돌리기 연구’인데요, 70대 후반 80대 초반 남성을 대상으로 6박7일간 여행을 하며 추억에 대해 심오한 토론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물론, 노인들은 이것이 실험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노인들은 2가지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20년 전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을 하면서, 청소, 설거지 등 집안일은 직접 해야만 합니다. 노인들은 처음에 적응을 못하며, 내가 이런 일은 어떻게 하며 불평을 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20년 전에 실제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며 자발적으로 설거지하고 마당을 쓸며 생활했습니다. 드디어, 실험이 끝나고 노인들의 시력, 청력, 기억력, 지능, 악력을 측정했는데 20년 전인 50대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로서, 암의 발생이나 재발을 막기 위한 중요한 원리는 우리 몸이 가진 정교한 ‘면역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암의 재발을 막는 구조를 만듭니다. 같은 암 환자라도 완치 후의 생활을 준비하며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활동을 계속하는 그룹이 좌절과 한숨으로 시간을 보내는 그룹에 비해 훨씬 생존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고모부 이글을 어디에 사용하려고 하는데 몇 마디 코멘트 해주세요.”

어떤 말이 적절할까? 숙제를 머릿속에 두고 하루 저녁을 보냈다. 다음날 나름의 제법 과학적인 가설을 세워, 코멘트 해 주었다. “좋은 글이야. 인간은 몸의 90% 이상을 자율신경계가, 마음의 90% 이상을 무의식이 지배하지. 그래서 자율신경계와 무의식이 긍정의 방향으로 가면 기적을 일으키고, 부정의 방향으로 가면 죽음이 되지. 평소 훈련으로 가능하다니 긍정적 행동이 중요하지.”

답이 왔다. “고맙습니다. 고모부.” 정겨운 호칭이다. 그러나 ‘북한의 고모부’는? 시중에 떠돌던 부정적 ‘가설’이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부정적 가설은 금물이다.

가설2. 행복. 나는 지금 행복한가? 자기에게 던지는 끝없는 질문이다.

그런데 마음이란 묘하여 같은 결과를 두고서도 ‘더 좋아 진 경우’는 행복을, ‘더 나빠진 경우’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니 행복에 대한 정의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고 기웃거리다 보니, 누군가 방정식을 만들어 놓았다. ‘행복 = 가진 것(소유, 성취) / 가지려는 것(욕망).’ 대체로 ‘더 좋아 진 경우’에 행복을 느끼니, 결국 행복은 만족 여하에 달렸다고 보면 이 공식은 일견 일리는 가설이다.

이 가설에 따라 행복해지려면 ‘가진 것’을 늘리든지, ‘가지려는 욕망’을 줄이면 된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은 늘리려고 애쓰고 있지만 쉽지 않다. 또한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비워라,’ ‘놓아라’ 하고 그토록 외쳐 왔지만, 개개인의 ‘가지려는 욕망’은 오히려 늘어만 갈뿐이다. 그러니 이 공식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무의미하게만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진 것’의 가치는 애착이나 사랑의 정도에 비례하여 커진다. 그러니 공식은 ‘행복 = (가진 것 × 사랑) / 가지려는 욕망’으로 바꾸어야겠다. 이렇게 바꾸어 놓고 보니 ‘사랑’과 ‘가지려는 욕망’은 서로 반작용 관계다. 우리는 일이나 사람, 소유물에 대한 ‘사랑’이나 ‘소중함’이 커지면 커질수록 여기서 무엇을 더 얻어내려는 ‘욕망’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 저절로 행복해 진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지려는 욕망’을 줄이기 위해 마음을 비우려고 애쓰지 말고, 순간순간 ‘가진 것’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을까? 혹시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김)도 이러한 경지에는 오는 것은 아닐까? 아하! 그래서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이 ‘사랑’이나 ‘자비’를 그토록 설파하였나 보다.

장만석 울산시 경제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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