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의 핍박·고초 이겨내며
출처없인 단 한자도 안쓴 역사학자
교과서 논쟁 앞서 ‘진인각’ 배워야

▲ 서기영 울산지방변호사회장

역사교과서 논쟁을 보면서 우리 역사학계의 수준이 이 정도로 천박한가 개탄스러웠다. 도대체 ‘일본의 식민지배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일부 보수진영의 주장,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역사관이 어떻게 이 땅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할 수 있었는지 절망적이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 제로라는 국민의 결단을 접하고는 역시 그래도 희망적이란 생각이 든다. 평균적인 국민의 역사의식 수준이 역사학자보다 한 수 위였다.

요즘 ‘진인각(陳寅恪)’이 자주 생각난다. 몇 년 전 <진인각, 최후의 20년>이란 1000페이지가 넘는 평전을 읽고 받았던 감명이 아직도 생생하다. 현대 중국의 4대 역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진인각, 진인각이 대륙에 남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년을 다루며 중국의 현대사를 돌아보고 있는 평전이다. ‘진인각’을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늦었지만 ‘진인각’을 알게된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 스스로 위로하였다.

진인각은 관롱집단설을 주창하여 지금까지도 중국 사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중국사 연구의 대가이다. 책은 진인각이라는 창을 통해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 등 초기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와 그 속에서 숨쉬고 노력하고 좌절했던 수많은 중국 지식인들의 삶을 복원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한 인물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기존의 평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책은 1950~60년대 중국의 거대한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학자의 길에 매진한 중국 지식인의 마지막 20년 투쟁의 역사를 다루며 ‘과연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라고 고민했던 진인각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백번의 역사교과서 논쟁보다 단 한 사람 ‘진인각’을 배우는 것이 낫다. 역사교육은 ‘진인각’을 가르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진인각’, 그는 중국 공산당이 통일을 앞둔 시점, 그를 대만으로 모셔가기 위해 장개석이 보낸 전용기가 북경공항에서 끝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타지 않았다. 그는 ‘출처 없인 단 한 글자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마르크스, 레닌의 역사학도 거부하였다. 문화대혁명 한복판에서 많은 핍박과 고초, 실명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을 거부함으로써 ‘중국 최근 300년래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역사학계의 별이 되었다. 무엇이 진정한 학문이고, 저항인지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우리나라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의 근간이 된 수·당 건국세력이 한족이 아니라 선비족과 한족의 혼인 집단인 ‘관롱집단’이라고 처음 주장해 중국 사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현재는 정설이 되었고, ‘동북공정’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중국의 지배세력이 호한병존(胡漢倂存)세력이라는 서울대 박한제교수 이론의 원전격이다.

당(唐)의 근간이 된 부병제가 선비족의 북위에서 유래된 것이란 것을 밝히기도 하였다. 평전에는 역사에 관한 학문적인 ‘진인각’의 업적은 한줄의 언급도 없고, 학문하는 자세에 대한 진인각의 진면목을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가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것도 진인각의 학문하는 자세, 역사관이니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진인각의 元(유종원) 白(백거이) 시사(詩史) 연구였다. 당시(唐詩)를 분석하여 당대의 사회체계, 안사의 난 이후 전란으로 인한 피폐 등을 밝혀내는 연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백거이의 ‘비파행‘을 분석해 연주한 노파의 출신, 직급 등 까지 유추해 내는 것을 보고는 감탄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장개석이 보낸 전용기를 ‘호적(胡適)’은 탔고 ‘진인각’은 타지 않았다. 조국을 배신한 ‘호적’은 살아생전 호사를 누렸으나 죽어 학계의 조롱거리가 된 반면 ‘진인각’은 살아생전 모진 고초를 겪었으나 사후 조국도 지키고, 학자의 양심도 지킨 사표로 추앙받고 말그대로 청사에 길이 빛나게 되었다. 보수주의 역사학자들이여! 누구를 따를 것인가. 진인각을 제대로 배우고 가르쳐라.

서기영 울산지방변호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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