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건 홍수로 대법원 기능 상실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사법개혁 과제

▲ 이수철 변호사 전 울산지법 수석부장판사

지난 6월 사법정책자문위원회가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상고심 기능 개선방안을 건의한 것을 계기로 법조계는 물론 세간에서도 상고심 제도 개선에 관한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다. 이 방안은 대법원은 중요 상고사건만 처리하고 그 밖의 일반 상고사건은 별도의 상고심 법원을 신설해 처리토록 하는 것이다.

국민의 권리구제 기능과 법률심 및 정책법원 기능이라는 두 축을 사이에 두고 대법원의 위상과 역할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사법역사에서 끊임없는 화두였다. 예나 지금이나 한편에서는 국민이 원칙상 모든 사건에 대해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대법원은 빈틈없는 권리구제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억울한 당사자가 없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분쟁이 늘어남에 따라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질서에 관한 대법원의 정책적 판단을 갈망하고 있다.

문제는 상고사건 급증에 따른 과도한 업무부담 탓에 대법관 14명으로 구성된 대법원만으로서는 국민의 두 가지 가치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더구나 하급심의 잘못을 바로잡아 개인의 권리를 구제하는 것보다는 전원합의체 운영을 통해 법령의 해석·적용을 통일하고 사회 정의와 형평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이 그리고 있는 대법원 본연의 모습이다.

사법부는 지난 70여년 동안 법령해석을 통한 사법적 가치판단과 개별적 권리구제는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대법원의 책무라는 법원 안팎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설치하거나 대법원에 대법관 아닌 법관을 배치해 이원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하거나 상고허가제를 시행, 대법원의 사건 수를 줄이거나 심리불속행제를 시행해 대법원의 업무부담을 완화하는 등 다양한 노력과 시도를 해왔다.

사법부의 이러한 노력과 시도를 깎아내릴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밀려오는 상고사건의 홍수 속에서 대법원은 정책법원 기능을 점차 잃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권리구제 기능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고(최근 3년간 상고심 접수건수는 3만6000건을 훌쩍 넘어서는데, 전원합의체 사건 수는 20건을 겨우 넘어설 정도이고, 상고심 파기율은 5~6%에 불과하다고 한다), 개별 사건 당사자의 불만의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원하는 결론을 얻은 상고인은 뻔한 결과를 얻어내는데 이리 많은 시간이 걸렸느냐고 불평하고, 반대의 결론을 받아든 당사자 또한 오랜 기간 재판해 왔으나 심리불속행제 때문에 이유도 모른 채 상고가 기각되었다고 불만을 호소한다).

이제 상고심 제도 개선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절체절명의 사법개혁 과제가 되어버렸다. 부디 이번 기회에 온 국민의 힘과 지혜가 한데 모여 대법원과 상고심의 체제 또는 운영방식 개편을 위한 입법적 노력이 커다란 결실을 보아 선진사법의 디딤돌을 놓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 논의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을 몇 가지 제시해 본다.

먼저 구체적 사건에서 충실한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는 상고심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소송당사자의 처지에서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고심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제한하는 입법 조치는 국민정서상 아직 시기상조란 지적이 대세지만 풍부한 경륜과 법률지식을 갖춘 법관이 충분한 심리와 검토를 거쳐 신속한 결론을 내리면서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까지 제시할 수 있다면 설령 해당 상고심 법관이 대법관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소송당사자는 실체적 진실 발견을 넘어 절차적 만족까지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으로 우리 헌법은 대법원에 국민의 권리구제를 위한 상급심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에서 나아가 법령의 최종적 해석을 통해 무엇이 법인가를 선언하고 법적 가치와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최고 사법기관으로서 기능을 다할 막중한 책무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운영의 활성화를 통해 권리구제 역할 위주에서 벗어나 정책판단 기능과 우리 사회의 근본가치에 대한 방향제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상고심 제도 개선의 핵심가치 중 하나여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사법부가 국민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법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법원과 상고심 구조의 합리적 재편과 더불어 사회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도록 대법관의 구성을 다양화하고 하급심의 재판역량을 충실화하는 것에도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반 관점에서 볼 때 대법원에서 내놓은 상고심 법원 신설안은 채택해 볼 만한 개선안이라고 생각된다.

이수철 변호사 전 울산지법 수석부장판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