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이관술과 대법원 판결

▲ 이관술 처형장.

지난달 27일 대법원이 울산인물에 대한 중대한 판결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벌였고 해방후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학암(鶴巖) 이관술(李觀述) 유가족들에게 그동안 입은 피해를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학암 선생이 돌아간지 60여년이 훨씬 넘었고 가족들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지 2년이 더 된 시점에 나온 판결이다. 학암의 막내 딸 이경환(81)씨는 2012년 학암 선생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었다.

가족들은 이번 승소가 학암 선생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생이 돌아간 후 가족들을 연좌제에 묶어놓고 괴롭혔던 국가가 가족들을 돕는 손길을 내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앞장섰지만
해방후 공산주의자 활동이 죄가 되어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에 연루
6·25직후 대전 골령골서 학살 당해

보도연맹 가입했던 맏사위 처형당하고
나머지 유족도 연좌제에 묶여 고통
유족, 최근 국가 상대 손배청구 승소
“배상금으로 학암선생의 무죄 밝힐것”

학암 선생은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주도했다는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6·25직후 형무소에서 가까운 대전 동구 산내면 낭월동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 대법 판결문.

이 판결은 그동안 학암 선생 유가족들의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필자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필자가 학암 선생 유가족들을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학암 선생 일대기를 지역신문에 연재하면서다.

1902년 울산 입암에서 출생한 후 서울의 중동고를 거쳐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던 학암 선생은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항일 운동에 앞장섰지만 해방 후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간부로 활동했기 때문에 한동안 그의 행적을 얘기하는 자체가 금기시 되었다.

이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이 그의 유가족들이었다. 학암은 두 번 결혼해 첫 부인 박가야씨 사이에 정환, 성록, 정선, 경환 등 4명의 딸을 두었고 동덕여고 교사로 있을 때 제자 박성숙과 결혼해 1명의 딸을 더 두었다.

이중 장녀 정환씨의 남편 박동철씨는 장인이 좌익활동을 한 것이 죄가 되어 6·25때 보도연맹에 가입, 처형당했다. 둘째 성록과 정선은 해방 후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서 살았지만 6·25때 행방불명되었고 둘째 부인 박성숙과 그의 딸 역시 6·25때 소식이 끊어진 후 지금까지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학암 선생의 유일한 피붙이가 현재 경주 양동마을에 살고 있는 경환씨다. 그는 평생 아버지의 업보를 안고 살았다. 어릴 때부터 ‘빨갱이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던 그는 그동안 세상이 싫어 ‘석동댁’이라는 택호로 양동마을에서 숨어 살다시피 했다.

필자가 양동마을에서 경환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남들이 이제는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저는 아직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가슴부터 떨린다”면서 “부디 나를 조용히 살 수 있게 더 이상 아버지 얘기를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잠시 경환씨에게 숨쉴 시간을 주었지만 5·16이 일어나자 반공을 앞세운 혁명정부는 경환씨를 포함한 학암의 유가족들을 여러 번 소환했고 결국 유가족들을 연좌제에 묶어놓고 괴롭혔다.

이런 그가 다시 희망을 가진 것이 필자가 학암 선생 일대기를 신문에 연재하면서다. 유가족들은 학암 선생의 일대기가 연재될 때까지만 해도 혹 이 기사로 다시 자신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지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아버지 행적이 보도가 되어도 옛날처럼 경찰의 소환도 주위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없자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신문 연재가 끝나고 학암 선생의 얘기는 <인물기행 문화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책자로 발간되었다.

필자는 그동안 책을 많이 발간했지만 출판기념회를 연 것은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출판 기념회를 개최했던 가장 큰 이유가 그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탄식하면서 살아왔던 유가족들을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출판 기념회는 유가족들의 대거 참여로 성황을 이루었다. 출판 기념회 후 세상이 달라진 것을 확인한 유가족들은 학암 선생의 비를 세우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이 때 필자는 울산의 각계 인사들을 만나 이 문제를 협의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인사들이 “아버지가 비록 공산주의자로 활동했지만 자식이 아버지를 기리는 비를 세우겠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해 학암 선생의 공적비가 1996년 선바위 휴게소에 세워졌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어도 좌익 인사를 대하는 인심은 아직 그대로였다. 비가 선 일년 뒤 울산의 우익 인사들이 학암 선생의 공산당 활동을 앞세워 ‘세워서는 안될 비석’이라는 지탄과 함께 이 비석을 뜯어내는 바람에 유가족들은 다시 한 번 상처를 입었다. 철거된 비석은 현재 입암마을에 묻혀있고 옛날 비석이 있었던 자리는 최근 공원이 조성되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런 논란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울산학센터가 지난해 <울산의 인물>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건국 후 울산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학암 선생이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를 못살게 굴어 ‘고문왕’으로 불리었던 노덕술과 함께 빠졌다. 이때 필자는 학암 선생과 노덕술을 단순비교해 그의 이름을 ‘울산의 인물’에서 빼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그의 공산주의 활동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그의 죄목은 위조지폐를 만들어 경제를 교란시켰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유가족들은 재판 자체가 날조된 것이라면서 재심을 요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조선정판사사건’은 이병주씨가 쓴 <남로당>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이 사건과 관련 1946년 10월 26일 학암 선생이 최후 진술을 통해 “‘조선정판사사건’은 사건 자체가 공산주의를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얘기했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당시 학암 선생의 최후 변론은 백석황 변호사가 맡았다. 백 변호사 역시 “학암의 자백이 고문에 의해 강제로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허구다”고 항변했다고 말한다.

당시 이 재판을 지켜보았던 해방일보의 박갑동 기자도 “정판사사건의 책임을 이관술까지 확대하는 것은 고의에 의한 조작”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검사의 구형대로 이관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해 학암 선생은 서대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6·25가 일어날 무렵 그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유가족들이 그를 최후로 본 것은 6·25가 일어나기 3개월 전이었다. 이 때 입암에 살았던 학암 선생의 4촌 동생 이수원(94)씨를 비롯해 유가족들이 그를 면회 했다.

이후 그의 행적이 사라져 항간에는 그가 6·25때 북한으로 갔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소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북한에서 재무장관을 지내고 있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그가 6·25 때 대전형무소에서 가까운 낭월동 골령골에서 처단되었다는 것을 찾아내었고 선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해 승소를 했다.

필자는 선생의 일대기를 쓰면서 대전과 서울 그리고 그가 대학생활을 보내었던 일본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선생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골령골을 방문했다. 골령골에는 작은 교회와 당시 비극을 알려주는 간판이 있었지만 선생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당초 2억8000여만 원의 배상금을 신청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조정되어 이번에 배상금으로 받는 돈이 1억6000여만원 정도다. 유가족들은 이 돈으로 앞으로 학암 선생의 무죄를 밝히는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한다. 학암 선생의 무죄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학암 선생이 돌아간 시점이 오래되었지만 아직 정부는 선생의 처형 내용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더욱이 선생이 재판을 받을 때는 미군정 시대였기 때문에 당시 정확한 재판기록이 미 국무성에 보관되어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러나 유가족들은 선생의 무죄를 밝히는 것이 다난한 길이지만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기회에 학암 선생의 옛 재산도 다시 찾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학암 선생의 부친 종낙씨는 당시 울산의 부자로 소문이 났을 정도로 많은 전답을 갖고 있었는데 유가족들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동안 이들 전답이 모두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학암 선생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동안 필자도 <인물기행 문화기행>을 발간한 후 선생의 옥중 생활과 대전교도소 생활 등 자료를 많이 수집했기 때문에 증보판을 낼 계획이다.

필자는 <인물기행 문화기행>의 서문에서 “우리나라가 애국가의 구절처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되기 위해서는 학암의 유가족들처럼 억울하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 늦은 감이 있지만 선생의 무죄를 밝히고 지난 60여년 동안 ‘눈물과 탄식의 바다’를 건너야 했던 유가족들에게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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