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반구대 암각화 제작시기에 관한 고고학계의 논쟁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지 40년이 지났다. 그간 이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어 많은 성과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바위그림이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나뉘어져 있어 논쟁의 쟁점이 되어 오고 있다. 필자는 ‘신석기시대’로 보지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에는 청동기시대로 되어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 시기가 논쟁의 쟁점이 되다 보니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다른 암각화의 제작 시기도 아직 불확실하다. 연대 파악을 고고학의 중요한 목적들 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고려하면 아이러니이다.

암각화 최초로 발견한 문명대 교수
신석기 시대 말기 견해 제시 불구
서울대 김원룡 교수 청동기 제작설
한국 고고학·고대사학자 다수 수용
당시 국정 교과서 반영되고 고착화

암각화 주변 신석기 주거지 없다는것
고래사냥에 쓰인 도구를 쇠뇌로 단정
민속학적 추가연구 등은 도외시한채
청동기시대 제작설 근거로 내세워
고고학 맥락 고려한 재연구 필요

▲ 네모 안에 있는 것은 쇠뇌[弩]가 아니라 고래사냥에 사용하는 부구(浮具)로 보아야 함.

반구대 암각화의 보존 문제와 관련하여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 위에 울산시민들의 물 사정, 카이네틱 물막이 설치 문제, 그리고 세계문화유산등재 등이 맞물려 있어 아주 복잡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다.

한편,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대부분의 언론 매체들은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시기를 ‘신석기시대’로 보도하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시기에 대한 의견이 이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을 때 각 급 학교 교사들은 어떤 설을 취해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고 또 학생들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또 일반시민들은 어떤 견해를 취해야 할지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인가. 이 제작시기 문제를 종식시키고 또 반구대 암각화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 시기에 대한 설득력과 신빙성 있는 연구결과가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최초로 발견한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는 제작 시기에 대해 ‘신석기시대 말기 혹은 그 이전’ 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연대관은 학계에 수용·반영되지 않았다. 그 후 1980년 서울대학교 김원룡 교수가 반구대 암각화는 ‘청동기·철기시대’에 제작되었다는 학설을 발표하였다. 그 이후 한국 고고학 및 고대사학자들의 다수가 이를 수용하여 당시 국정교과서에 반영되었고 거의 고착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를 ‘청동기·철기’시대로 간주하는 근거로는 철제 도구로 제작된 흔적, 고래 몸속에 박혀있는 것은 미늘이 있는 철제 화살촉으로, 그 옆에 있는 물상은 그것을 발사한 쇠뇌(弩)로 본 점, 신석기시대에는 외양선을 제작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근래 지질학자들이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퇴적암의 쉐일(shale)로 석제 도구로도 제작이 가능하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청동기시대에 석기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또 고래사냥 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간주되는 부구(浮具)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 주변에 신석기시대 주거지가 전무한 반면 청동기시대 주거지만 조사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러한 대부분의 주장은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 반구대 암각화가 사실적임에 비해 천전리는 추상적이어서 청동기시대로 보아야 함.
 

우선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에도 석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80년 제작 시기에 대한 학설이 도출되었을 때 그러한 가능성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부구의 경우도 부구일 가능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상황에서 쇠뇌로 추정하고 논지를 전개시켰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고래사냥은 반구대 암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고래사냥을 하였거나 현재도 하고 있는 고고학, 민족지학, 인류학, 혹은 민속학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특정한 물상에 대해 피상적인 판단을 하여 이를 쇠뇌로 보고 고래사냥을 할 때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부구는 애당초 도외시 하였다. 미국 워싱턴주에 거주하고 있는 마카 인디안들은 고래사냥에 최소한 두 가지 종류의 부구를 사용하였고 작살 하나에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밧줄에 무려 13개의 부구가 달려있으며 어떤 경우 20여개 까지 이른다는 인류학적 연구가 있다. 따라서 과거 쇠뇌로 이해하고 제작 시기를 검토한 물상이 쇠뇌가 아닌 부구라면 제작 시기에 대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학문적인 순서이다.

반구대 암각화 주변에 신석기시대 주거지가 전무하다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최근에 발굴되었다. 이것은 차치하고 실제로 이 인근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엄청나게 많이 조사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주거지에서 확인된 유물들은 석촉, 석검, 반월형석도, 석부, 그리고 석겸 등 농경사회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청동기시대의 것들이다. 흙으로 빚은 어망추도 다수 출토되기는 했지만 깊은 바다가 아닌 민물고기 잡이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것들이다. 더 중요한 점은 이들 주거지에서 청동기시대 고래사냥이 수행되었을 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유물은 단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상황은 반구대 암각화에 보이는 고래사냥 그림은 신석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사한다.

다른 한편, 그간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많은 고고학 발굴조사가 수행되면서 반구대 암각화의 연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새로운 물적 증거들이 확인되었다. 예를 들면, 울산 남구 황성동에서 고래 견갑골과 경추에 골촉이 박힌 고래 뼈 2점, 상어 및 고래 뼈, 노루, 멧돼지, 사슴 뼈 등이다. 이 동물들은 반구대 암각화에 묘사되어 있는 빈도수가 높은 동물과 일치하고 있다. 또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사슴을 선으로 새긴 토기편, 고래 귀 뼈, 흑요석제 석촉, 창녕 비봉리 신석기유적에서 출토된 2개체분의 통나무배 등이다.

반구대 암각화 제작 시기를 규명하는 데 이러한 물증 외에 다른 고고학적 맥락도 아울러 검토되어야 한다. 우선 외국의 사례를 보면 유럽에서는 이미 기원전 3만-2만 년 전에 반구대 암각화의 암석보다 더 단단한 석회암에 돌로 암각화가 새겨졌고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안들은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만 년 전에 이미 암각화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우리나라 고고학 혹은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정확한 제작 시기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 같은 외국 암각화의 예에 대해서도 주목을 해야 한다.

반구대 암각화 이외 우리나라 대부분 암각화의 표현은 추상적인 것들로서 반구대의 사실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반구대 암각화 가까이에 있는 천전리의 경우만 하더라도 일부에 고래를 비롯한 해양 및 육지동물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동심원과 나선형의 원, 그리고 마름모꼴 등의 기하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령 양전동, 포항 칠포리 및 농발재, 영주 가흥동, 영천 보성리, 남원 대곡리, 경주 안심리 광석마을 및 석장동 등지에서는 검파형(혹은 방패형이나 패형이라고도 불려짐) 이라고 일컬어지는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특히 경주 안심리에서 발견된 검파형 암각화는 크기가 비교적 작은 것이며 지석묘의 상석에 새겨져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것들조차도 사실적 혹은 구상적인 것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반구대 암각화의 물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강봉원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포항 기계 인비리 지석묘의 상석에는 마제석검과 석촉이, 여수 오림동 지석묘의 상석에는 마제석검이 새겨져 있다. 함안 도항리 지석묘 상석에는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그간의 고인돌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남 여천 적량동 지석묘처럼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석검과 석촉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인돌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라는 것도 일반화되어 있다. 따라서 천전리 암각화와 고인돌 상석에 새겨져 있는 동심원, 석검과 석촉 등은 모두 동시기인 청동기시대로 간주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만약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 시기를 청동기로 간주하면 기하문을 가진 천전리 암각화는 갈 곳이 없어진다. 이러한 전반적인 고고학적 맥락을 고려하면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 시기를 신석기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강봉원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반구대포럼·울산대공공정책硏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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