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이 지향하는 품격 있는 도시는
도심 속에 걷고 싶은 길이 있는 곳
보행자 늘면 상권도 품격도 살아나

▲ 정명숙 논설실장

걷기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멀게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깝게는 제주도 올레길에서 번진 전국적인 유행이다. 필자도 제주 올레길은 몇차례 걸었다. 그저 평범한 들판과 숲속길, 바닷가를 무작정 걷기만 하는데도 묘한 매력과 중독성이 있다. 아직은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지만 언젠가 산티아고도 가보고 싶다. 울산에서도 틈나는 대로 태화강변도 걷고 마을 뒷산도 걷는다. 주말에는 솔마루길과 동대산길을 걷기도 한다. 산길을 걷지만 굳이 등산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 힘들지 않는 길을 따라 두 세 시간 무작정 걷는다. 몸이 지치면 쉬어가고 길이 끝나면 멈춘다.

외국 여행을 가면 더 많이 걷는다. 다만 걷는 길이 도심으로 바뀐다. 책자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몇몇 이름난 볼거리를 목적지로 정하고는 도심 속을 대책 없이 걸어 다닌다. 택시는 거의 타지 않는다. 걷다가 찻집이 좋아 보이면 불쑥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고 나온다. 때론 불로거들이 추천하는 밥집을 찾아 수 십분 동안 헤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리가 아프면 길거리 벤치에 앉아 방랑자처럼 간식을 먹기도 한다.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만 지하철 또는 버스를 이용한다. 가장 최근 3박4일의 외국 여행에서는 하루에 2만1165보~1만4237보를 걸었다. 지난여름 여행에서는 하루에 3만5657보를 걸었던 날도 있다. 휴대전화의 헬스앱에 그렇게 기록돼 있다.

많이 걸어 다닌 곳일수록, 아니 많이 걷고 싶었던 도시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이름난 그 무엇이 아니라 보도블록, 가로수, 벤치, 건축물, 간판, 행인들의 발걸음, 가로등 불빛… 도시의 피부들이 제각각 오감을 자극한다. 시시각각 다른 모습의 도시가 가슴 속 깊숙이 자리 잡는다. 재방문을 다짐하게 되는 이들 도시들은 한결같이 보행자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돼 있다. 인도가 끊어져 걸을 수 없거나 차가 사람을 방해하는 일은 없다. 일부러 관광객을 위해 편의를 도모한 것은 아니다. 도시에 보행권이 확보돼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울산 도심은 걷기에 힘 든다. 도심을 걸어 다니려면 종종 운전자들로부터 욕을 얻어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눈치껏 차를 피해 뛰어야 하고 때론 교통시설물도 모른 척 해야 한다. 보도블록이 울퉁불퉁해서 신발을 잘 챙겨 신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땅을 살피지 않고 걷다가는 넘어지기 일쑤다. 로터리도 많고, 인도가 끊어져서 한참을 돌아서 가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다. 걸어 다니는 것이 잘못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시, 관광객이 많은 도시는 죄다 ‘걷고 싶은 도시’다. 울산시가 지향하는 ‘품격 있는 도시’가 되려면 걸을 수 있는 도시가 돼야 한다. 도심 속에서 걷고 싶은 길을 만들어야 한다. 거창하게 새로운 시설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보도블록을 다듬고, 길섶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횡단하기에 수월하도록 교통시설물을 정비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불법 무단적치물을 내놓지 못하도록 행정지도도 해야 할 것이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도시의 상권도 품격도 살아나기 마련이다. 서울의 삼청동과 북촌, 서촌이 그 좋은 사례다.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처럼 자연으로부터 시작된 걷기 열풍이 사람 냄새 물씬하고 볼거리 풍성한 도심 속으로 확산되는 중이다. 수년전부터 불기 시작한 유행이지만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걷는다는 것은 자발성, 순수성, 감수성, 진정성이 동반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명숙 논설실장 ulsan1@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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