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성파스님이 들려주는 학(鶴)과 우리 문화(하)

▲ 지난해 열린 통도사 개산대제에서 백성 스님이 ‘통도사학춤’을 추는 장면.

‘학’(鶴)을 문화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학춤’이다. 학춤은 하늘을 나는 ‘학’(鶴)의 자태를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다. 학(鶴)문화의 대표갈래인 학춤에 대해 영축총림 통도사 서운암의 성파(사진)스님은 “기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나 학의 고장인 울산과 양산이 신라문화권이었으니, 1000여년 전인 그 언저리에서 뿌리를 찾아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시대는 불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시기와 맞물리는데, 초기불교가 토속신앙과 합쳐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종교적 산물이 아닐까싶다”고 말했다.

성파스님은 “자고로 고(苦) 보다는 낙(樂)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습성인데, 그 옛날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 교리를 펼치고자하니, 인간습성에 부합되는 ‘춤’을 매개로 하면 좀더 수월하다는 것을 알게됐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학춤’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경전은 교리를 글로써 전파하는 것이고, 설법은 말로써 알리는 것인데, 그 옛날 글과 말만으로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대중이 많지 않았으니, 다수 대중을 효율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습성을 고려한 ‘춤’을 통해 일종의 ‘맞춤식 포교’를 실행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 성파(사진)스님

성파스님은 “요즘은 잠시 맥이 끊겼지만 예전에는 승려들이 설법의 또다른 방식인 학춤을 사찰 내에서 자주 췄다”고 말했다. 다만 “단순하게 학이 노니는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라, 깨달음의 단계를 동작으로 표현하고 마지막에는 해탈의 경지까지 다다르는 춤사위로 이어졌다”며 “한마디로 화쟁사상을 학춤 하나에 집약시킨 것”이라고 해석했다.

인간습성 부합되는 춤 매개
맞춤식 포교에 활용했을 것
화쟁사상 학춤에 집약시켜

성파스님은 젊은 시절 실제로 1950년대까지 통도사 내에서 승려들이 학춤을 추는 모습을 자주 봤었다. 특히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통도사 초대 광복주지로 추대된 대응 스님(1897~1968)에)에 대한 추억담도 들려줬다. 성파 스님은 “젊은 시절의 대응 스님은 신체가 건장하고 말소리가 우렁찼는데, 1919년 당시 양산신평만세운동을 주도해 젊은날을 도피생활로 보내기도 했다”며 “통도사로 다시 들어왔을 때는 오랜 타지생활 중에 배우고 익힌 노래도 들려주고, 학춤까지 스스럼없이 자주 추는 것을 직접 봤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돌아가신 김덕명(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제3호 한량무 보유자) 선생이 당시 대응 스님의 상좌였다”며 “불교정화 이후 절에서 배웠던 학춤 등을 부산 동래 등 절 밖에서만 수십년씩 추다보니 정작 경내에서의 학춤은 맥이 끊기고 오히려 민간에서 ‘동래학춤’ ‘양산학춤’ ‘울산학춤’ 등의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파스님은 더 늦기 전에 우리나라 학춤의 정통성을 바로 세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명 ‘통도사학춤’과 그에서 파생된 여러 갈래의 학춤 계보를 하루빨리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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