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산태극수태극 영남알프스 18경 (17)얼음골 층층빙곡

▲ 오천평반석. 대리석을 깔아놓은 듯이 넓은 평석으로 맑은 물이 미끄러져 흐른다. 쇠점골 계곡은 바위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장꾼들이 목숨 걸고 넘던 지름길,얼음골 층층빙곡

천황산(天皇山) 산자락에는 목숨을 걸어야 넘나들 수 있는 층층빙곡(層層氷谷)이 숨겨져 있다. 요즘에야 케이블카가 들어서 단번에 오르내릴 수 있지만 대명천지에 호랑이가 출몰하던 예전만 해도 목숨을 건 행로였다. 특히 부산 구포장에서 밀양 팔풍장이나 청도 동곡장을 드나들던 기러기 장꾼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층층빙곡을 타다 황천길로 떨어지기도 했다.

탐방대가 용(龍) 아가리나 다름없는 층층빙곡을 찾은 시기는 숲 향기가 그윽한 5월이었다. 이 무렵이면 떼죽나무, 함박나무, 노각나무가 앞 다퉈 꽃향기를 내풍겼다. 무시로 만나는 이들 숲향기야말로 산을 오르는 청량제이다. 산을 오를 때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발품의 원동력은 아무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이 아니겠는가. 텅 비운 가슴에 숲향내마저 더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기어오르기도 힘든 돌무더기 위로
장꾼·화전민들 수도없이 오르내려
얼음골 냉골바람은 명품사과 키워
먹을것 없던 산골 부자마을 만들어

탐방대는 천황산 산발치에 서서 삐딱하게 선 얼음골 협곡을 바라보았다. 탐방대가 올라야 할 닭벼슬(닭 볏) 암릉은 아득하고, 머리위로는 얼음골 케이블카가 무심히 지나고 있었다. 갈 길 먼 구포장꾼들은 비식이 웃는 저 고깔 봉우리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탐방대는 영안실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얼음골을 향해 선걸음을 내디뎠다. 천황사에서 만난 노보살은 “저 캄캄한 골짝에 장군이 칼을 찔러 터진 가마솥 협곡이 있소. 폭포는 끓는 솥이고 협곡 가랑이는 굴뚝이요. 그 골짝엔 허준이 스승 해부를 했다는 서늘한 동의동굴도 나와요”라고 미리 일러주었다.

탐방대는 검정버섯이 듬성듬성 핀 얼음골 응달을 내쳐올랐다. 잠시 후 돌무더기에서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는 돌무더기 분출구가 나타났다. 삼복더위에 돌무더기를 뒤지면 얼음을 따먹었을 수 있고, 겨울에 더운 김이 나온다는 신비의 골짝이었다. 2만9700㎡(9000평) 규모의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 분출구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은 여름 땡볕의 압력으로 겨울에 분출되는 기화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얼음골 분출구를 지나자 네 발로 기어올라야 하는 돌무더기가 무지막지하게 이어졌다. 날을 세운 돌, 평평한 돌, 모난 돌…. 온갖 돌들이 가파른 돌계단을 이루고 있어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었다. 거기다 길 이름까지 ‘빚덤이’라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치 빚에 쫓기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르고 또 올라도 돌계단의 연속이었고, 층층암벽에 막힌 오르막은 한숨밖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고개라도 패랭이 쓴 장꾼들이야 이문만 남는다면 태산백리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토록 험악한 길을 원숭이처럼 타고 다닌 사람들이 있다. 사자평원의 억새를 베러 다닌 얼음골 주민은 이렇게 말한다. “억새지붕 품앗이를 하려면 비렁방구를 타야죠. 사자평목장 일을 하던 화전민들은 하루에 두 번도 탔어요.”

▲ 얼음골 층층빙곡. 김성동(울산사생회 회장)

소금장수 울고 가던 얼음골 골짝은 축복의 땅이 되고

탐방대는 굴곡진 길을 오롯이 두 발로 걸어 정상에 올라섰다. 천황산 감투봉에서 바라본 스카이라인은 가히 압권이었다. 가지산, 백운산, 운문산, 억산, 구만산, 실혜산, 정각산, 천황산을 잇는 스카이라인을 비롯해 석남재, 도래재, 아랫재는 젖가슴 라인을 드러냈다. 천황산에서 석남재로 이어지는 일(一)자 능선 아래에 걸린 줄밭등(천황산~도래재), 숫구덩(천황산 감투봉~숫마), 빗듬이(사자평~얼음골), 히리미기(정승봉~추곡)는 산을 이고 있었다.

탐방대는 장꾼들의 지름길이었던 용아암릉을 타고 얼음골로 하산했다. 얼음골에는 유서 깊은 지명이 많다. 중마, 안마, 숫마는 예로부터 말을 키우는 말 바탱이(馬田)였다. 선인들은 마전에서 말을 세우고, 시례(詩禮)에서 시를 썼다. 시례는 <사서오경> 중에서 시(詩)와 예(禮)를 따왔고, 깨뜰은 깨가 많이 나서 붙여진 들이다.

탐방대가 호박소(臼淵) 고을에 접어들자 별안간 마른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들었다. 무슨 변괴인가 싶어 주변 산을 올려다보니 운문산과 가지산은 햇볕이 쨍쨍한데, 건너편 천황산 봉우리에는 먹장구름이 끼어있었다. 얼음골은 사방이 틀어 막혀 ‘샛날바람’이라는 냉골바람이 분다. 샛날바람이란 냉골바람이 넘어가지 않고 맴도는 변화무쌍한 기후를 말한다. 이 고을의 최고령자(94) 강 노인은 소나기를 쫄딱 맞은 소금장수가 울상이 되어 석남재에서 내려오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고 했다. “비보다 소나기가 먼저 넘어오는 데가 도래재야. 아랫재에 구름이 실실 끼면 캄캄해진 석남고개에서 비를 만나지.” 도래재는 표충사 가는 고개이고, 아랫재는 운문사, 석남재는 언양장으로 이어진 고개를 말한다.

▲ 신비의 얼음골. 5월에도 얼음이 언다는 빙곡(氷谷) 돌무더기가 산더미를 이룬다.

“내 클 적엔 얼음골 산다는 말도 못했어. 광산마을이라 했거든. 막힌 골짝이라 해먹을 거라곤 광산에서 돌 파내고, 산에서 마루다 하는 일뿐이었어.” 강 노인이 말하는 ‘마루다’란 일본어 마루타(통나무)로, 도벌(盜伐)을 말하는 것 같았다. 막다른 골짝 얼음골에 광산과 밀목이 성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얼음골 주민들은 난리 통에 못볼꼴도 겪어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군수물자 부역에 동원되었던 한 토박이 영감은 “물불 안 가리는 게 전쟁이야. 실탄을 마디리포대(마대자루)에 지고 가지산에 져 날랐어.” 강 노인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말했다. 하지만 얼음골은 축복의 땅으로 변했다. 익던 호박도 얼어터지게 했던 냉골바람은 명품 사과를 키워냈고, 얼음골사과는 부자마을을 만들었다. 강 노인은 가지산 아래 석남고개를 가리키며 “언양장에서 소 팔고 송아지 사 오던 장길이 있어. 오며가며 요기하고 술 한 잔 걸치던 주막 터가 아직 남아 있을 테니 찾아봐.” 강 노인은 이어 “석남잿길은 언양장을 드나들던 얼음골 사람들이 많이 삐댄 길이야. 석남터널이 난 뒤로 밀양 얼음골 사람들은 목욕 이발도 언양으로 다닌다”고 귀띔해 주었다. 얼음골에서 밀양장까지는 60리, 언양장은 50리이다.

문경새재보다 더 아름다운 옛길, 쇠점이 계곡

탐방대는 강 노인이 일러준 장길을 향해 유유자적 걸었다. 쇠점이(혹은 쇠점골, 쌈지골, 이미기골로 불린다)라 불리는 십리비탈길은 바위 전시장이나 다름없는 옛길이었다. 가지산 중봉에서 흐르는 약수는 오장육부를 씻어내었고, 숲속에서 우는 새 소리와 계곡 물소리는 깊은 골짝을 빠져나가질 못하고 귓가를 맴돌았다. 잘 단장된 비탈길은 4계절 내내 걷기에 좋다. 봄엔 숲이 좋고, 여름엔 시원한 그늘이, 가을엔 단풍이, 겨울엔 설경이 눈부시다. 열두 징검다릴 건널 땐 원님은 마차로 건너고, 사랑하는 임은 안아 건너고, 노루는 시냇물에 얼굴 단장하고 숲으로 숨는다.

▲ 배성동 소설가
▲ 김성동 화가

맑은 물이 철철 넘치는 선녀탕을 곁눈질하고, 널따란 오천평반석을 지나자 ‘쇠짐이 주막’ 터가 나왔다. 구순의 강 노인이 일러준 길을 더듬어 형제폭포 물가에서 주막 터를 볼 수 있었다. 주막은 독가촌 이주정책에 밀려 사라졌고, 옛길은 석남터널이 생기면서 묻혔다. 1980년대 뚫린 석남터널은 꽉 막혀있던 얼음골을 눈뜨게 하였다.

석남재 터널 입구에서 30년째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금천댁은 청도 매전면에서 산내면으로 시집을 왔다. 눈이 많이 오는 산중이라 눈 올 땐 포장마차 문을 닫는다. “언양장에서 꽁치 사들고 태산 같은 석남고갤 넘었어요. 새벽에 콩나물 키우는 파란 콩 이고 고개만디에 오르면 날이 허구먼(허옇게) 새요. 거기서 삼베에 싼 꽁보리밥 까먹고 언양장까지 진땅 걸어요. 김 모락모락 나는 장터국밥집에서 주린 창자 한 그릇 때우고, 축 쳐진 꽁치 사들고 집에 돌아오면 오밤중이요. 꽁치 대가리랑 꽁대기(꼬리) 끊고 소금 철철 뿌려 시아버님 밥상에 올리면 잘 잡사. 꽁치 대가리랑 꽁대기는 씨래기 찌개에 끓여 우리가 먹어요.”

비 보다 소나기를 먼저 만나는 층층빙곡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촌로의 신세타령은 끝이 없었다.

*영남알프스학교 다음 산행 6월18일(토) ‘운문재 옛길’ 연락처 010·3454·7853 http://cafe.naver.com/ynalps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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