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백두대간 제20구간(버리미기재~대야산~청화산~늘재)
거리 15.9㎞, 시간 9시간5분

버리미기재에 다시 섰다. 봉암사(鳳巖寺)가 있는 경북 문경 가은읍과 화양동 계곡이 유명한 충북 괴산 청천면을 연결하는 922번 지방도가 대간 마루 금을 넘어가는 곳. 지난 구간, 장성 봉에서 버리미기재로 내려설 때 땅거미가 내리던 마루가 흰 눈으로 온통 치장을 해서 마치 동화 속 풍경을 보는 것 같았던 환상의 고개였다. 3월이라 해도 해 뜰 무렵의 산 속 기온은 아직 차갑다. 알싸함 속에 봄을 기다리는 버리미기재의 적막한 아침 풍광도 아름답다. 눈이 덮였을 때처럼 환상적이지는 않아도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나무들이 잿마루에 터널을 이루며 도열하고 있어 그윽한 모습이다.

산행 초입부터 진행방향 왼쪽의 문경 가은지역과 오른쪽의 괴산 청천지역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야에 들어온다. 둥실둥실한 화강암이 곳곳에 단애(斷崖)를 이루는 산의 지형이 막힘없는 조망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 조항산(鳥項山)은 기암절벽과 옥수(玉水)가 한데 어우러져 묘미를 더해준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마치 하늘 위에 오른 기분이다. 조항산에서 해발 889m 무명 봉으로 가다보면 산을 마구 허물다 중단된 고모치 광산이 나온다.

흙 한줌 없는 바위에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을 지키고 선 소나무의 기품이 한복의 그림이 되어 산꾼의 시선을 앗아가는 곳 또한 한 두 곳이 아니다. 버리미기재에서 약 1㎞정도 거리에 있는 20구간의 첫 번째 봉우리 곰넘이봉까지 가는 데도 대원들은 연신 진행을 멈춘다. 주변을 돌아볼 거리가 많아서다. 지형은 거칠어도 다른 구간에 비해 이번 구간은 거리도 짧다. 시야가 열리고 풍광이 좋은 곳에서 대원들은 어김없이 ‘산정무한’(山情無限)을 즐긴다.

“와! 크다…” 곰넘이봉에 서니 가야할 대야산이 헌걸차게 솟아올라 위용을 드러낸다. 대야산의 대야(大耶)는 ‘크다’는 의미다. 산 이름을 지을 때 곰넘이봉에서 대야산을 보며 그 느낌 그대로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대야산은 해발 930m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변의 키 낮은 능선에서 하늘을 향해 불쑥 치솟아 오른 암봉의 모양은 실로 웅장해 보인다.

문경과 괴산지역 교류길 블란치재
두상 닮은 미륵바위는 눈길끌지만
대리석 채굴로 상흔남은 산도 보여
산길 걸으며 금수강산 보존 되새

곰넘이봉에서 블란치재로 가는 길에는 대야산을 뒷배경으로 앉은 미륵바위를 만난다. 억겁의 세월동안 비와 바람이 빚어낸 사람의 두상을 닮은 형상이다. 미륵바위는 이곳을 지나는 산꾼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와 미륵바위를 배경으로 한 추억의 장소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윽고 내려서는 블란치재는 버리미기재가 지방도로 번듯하게 나기 전, 문경과 괴산 사람들이 교류를 위해 넘나들던 고개이다. 우리말이라고 하기엔 독특한 블란치재는 추측건대 불한치(不寒峙) 즉 ‘춥지 않은 고개’의 한자말이 소리글로 불리다 현재의 ‘블란치’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말도 아니고 방언도 아닌 블란치재. 지명 유래를 찾아봐도 특정지을만한 사료가 없어 감히 가설로 추측을 해 본다.

▲ 곰넘이봉에서 블란치재로 가는 길에는 대야산을 뒷배경으로 앉은 미륵바위를 만난다. 억겁의 세월동안 비와 바람이 빚어낸 사람의 두상을 닮은 형상이다.

블란치재에서 대야산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해발 668m의 촛대봉이 있다. 전국 도처의 촛대봉은 대체로 이름처럼 끝이 뾰족하고 경사가 급하다. 하지만 이곳 촛대봉은 이름에 비해 능선은 부드럽고 정상부 또한 평범한 봉우리다. 곰넘이봉과 대야산에 끼여 드러나지 않는 산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촛대봉 뒤에 위압적으로 솟아있는 대야산 위용 탓에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촛대봉에서 잠시 쉬면서 대야산 오름을 위한 호흡 조절을 한다. 곧이어 약 200여m에 걸쳐 경사가 급하기로 소문난 대야산 직벽 험로에서 로프와 씨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험구간에서는 앞뒤 대원간의 안전을 서로 육안으로 확보하면서 대원들이 산행에 집중 또 집중하게 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대야산 동쪽에 해당되는 직벽에 결빙된 곳이 없어 비교적 수월하게 산정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대야산은 아름다운 산이다. 이름처럼 크기만 한 게 아니라 크게 아름답기도 하다. 희고 깨끗한 바위 군으로 이뤄져서 주변을 둘러보는 조망권이 일품이다. 주변에 시야를 가리는 큰 산군이 없어서 눈이 모자라도록 먼 곳까지 우리의 산하를 열어 보인다. 감히 서툰 말로 표현을 해서는 실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래서 우리의 산하를 금수강산이라 하는가보다. 아름답다.

대원들의 움직임도 정중동(靜中動)이다. 대야산이 보여주는 풍광에 빠져들었다. 머무를 수 없기에 더 지극한 마음이다.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각을 두고 길을 이어가야 하니 한 곳이라도 더 보려 애를 쓴다. 눈에 스치는 모든 장면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새겨 담고, 다가갈 수 있는 곳은 모두 다가가서 기억의 저장고에 저장을 하는 모습들이다. 산에 들었으니 산을 볼 뿐이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사람들의 무지를 볼 수 있는 곳 또한 이 구간이다. 대야산에서 밀재에 내려섰다가 조항산을 향해 길을 열면, 동쪽의 문경 둔덕산과 갈라지는 해발 889m 무명 봉이 나온다. 무명 봉 좌우로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석재(石材)를 캐내던 광산이 산을 마구 허물다가 중단이 된 곳이 있다. 지역 명을 딴, 일명 고모치 광산이다.

건축시장에서 ‘문경석’이라 불리며 중국산 석재에 비해 비싸게 거래되었던 대리석을 채굴하던 현장이다. 오로지 돈이 된다면 백두대간 생태 축은 물론이고 희고 깨끗한 화강암과 금강송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금수강산도 파헤치고 보는 광산업자의 몰염치나 채굴을 허가한 공무원의 무지가 한없는 안타까움으로 전해오는 현장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은 모두 폐광이 되었지만 한번 허물어진 산은 복원이 되지 못한 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을 참으로 아픈 상처다. 이 나라, 이 땅을 지켜가는 방법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왜 보존하고, 왜 지켜가야 하는지 위정자들은 이 산길을 꼭 한번 걸어볼 일이다. 산길을 걸어보아야 산이 보인다.

 

이번 20구간 산행지는 좀 별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북에서 남으로 이어진 능선, 들머리 버리미기재에서 날머리 늘재까지 각각의 봉우리 아래에는 동과 서를 잇는 고갯길이 모두 나있다.

곰넘이봉 아래에는 블란치재, 촛대봉 아래에는 촛대재, 대야산 아래에는 밀재, 해발 889m 무병 봉 아래에는 고모치, 조항산 아래에는 갓바위재, 청화산 아래에는 속리산과의 사이에 늘재가 있다. 모두가 동과 서로 문물이 교환되었고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다. 각 봉우리 아래마다 고갯길이 있었다는 것은 이 산 허리를 끼고 사람들이 기대어 살았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 까마득한 옛날, 구절양장 척박했을 이곳이 전란과 풍토병을 피하고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 살아가기를 희망했던 은자(隱者)들의 땅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청화산인(靑華山人) 이중환(李重煥·1690~1756)은 “흙봉우리에 돌린 돌이 모두 수려하고 삼기가 적고 모양이 단정하고 평평하여 빼어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아 자못 복지다”라고 청화산을 칭송했다. 또한 청화산 아래에는 길지(吉地)로 알려진 우복동천(牛腹洞天)이 있다.

 

동천(洞天)의 사전적 의미는 ‘산과 내로 둘러싸여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좋은 곳 또는 신선이 사는 세계’로 되어 있다. 산 좋고 물 좋은 우리나라 곳곳에 동천이란 지명을 쓰는 곳은 여러 곳이다. 영남알프스를 끼고도 가지산 아래 옥류동천(玉流洞天), 영축산 아래 자장동천(慈藏洞天), 구만산 아래 구만동천(九萬洞天) 등이 있다. 우복동천(遇伏洞天)으로 널리 알려진 경북 상주 화북(化北)은 청화산과 속리산, 도장산이 삼각형으로 감싼, 소의 뱃속 같은 고을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우복동천’을 이렇게 노래 불렀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예전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다고 한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이 없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짓기 알맞아서
백 년 가도 늙지 않는 장수의 고장이라네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산꾼이 산을 가리겠는 가만은 사람이 꿈꾸는 이상향을 품은 산이라고 하니 산에서 내려서면서도 자꾸만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된다. 푸르게 빛나는 산, 청화산(靑華山)을 내려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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