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식민지는 국민에 큰 고통
성장동력 찾기에 함께 힘 모으고
잠재력 끌어내 경제위기 극복해야

▲ 권영해 울산창조경제혁신센터장

‘다른 나라의 정치적 식민지가 되는 것도 비극이지만,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은 더 비참할 수 있다.’

우리 경제가 위기라고들 한다. 자본도, 자원도 부족한 토대에서 남다른 성실과 의지로 기적처럼 일궈낸 성장 동력이 여러 가지 이유로 약해진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분석을 자주 듣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과거 불가리아 회사를 인수하여 그곳에 부임했을 때의 경험들이 떠오른다.

1997년 10월 불가리아 소피아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면서 봤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거리에는 도색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수리조차 하지 못한 낡고 우중충한 잿빛 건물들이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20년은 넘어 보이는 구소련이나 동독제 자동차들이 높은 휘발유값을 감당하지 못해 방치돼 있었다. 도로는 곳곳이 패어나가 조금만 방심하면 자동차가 손상될 정도의 웅덩이들이 수두룩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불가리아의 사회주의 경제 또한 막을 내리고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따라 인수한 공장은 과거 6000명이나 일하던 큰 공장이었지만, 인수 당시 10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기본적인 수리조차 못하여 공장 바닥은 흙바닥 그대로였고, 유리창도 제대로 붙어있는 것이 없었다. 직원들의 월급은 100달러에도 못 미쳤다. 낮은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4인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부족한 돈이었다. 겨울에는 난방비를 아끼려고 방 하나에서 모든 가족이 모여 지내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불가리아는 면적이 남한보다 약간 큰 11만㎢의 나라로서, 다뉴브 강변의 구릉지대와 흑해 연안의 넓은 평원이 국토의 70%에 이르는 풍요한 농업국이면서, 공업화도 우리보다 먼저 시작하여 경제적으로 더 잘 살던 나라였다. 그러나 필자가 부임했을 때는 비효율적인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경제의 파탄으로 IMF의 구제 금융을 받아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회사의 1000명에 가까운 불가리아 직원 역시 한국에서 파견된 2명의 지배를 받아야 했으며, 회사 회생을 위해 절반 정도가 회사를 떠나야 했다.

부임 후 제일 먼저 해결해야 했던 과제는 은행으로부터 대출 라인을 여는 업무였다. 그 당시 불가리아는 이미 신용제도가 무너져 공사를 수주하고도 자재를 구입할 돈이 없어 공사에 착수할 수 없었고, 자재 수입을 위한 신용장(L/C) 또한 100% 현금을 넣어야 발급을 해주는 등 금융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된 상태였다.

다행히 본사의 보증을 받아 독일계 은행에서 200만달러 한도의 당좌대월을 받아 계약이 거의 성사 단계에 있을 때, 우리나라가 IMF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독일계 은행 지점장으로부터 당좌대월 계약 종료를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환율의 급등으로 회사의 수익이 더 커질 것이라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귀사는 믿을 수 있지만, 대한민국 자체가 부도상태이므로 국가위험이 커 대출이 불가능하다. 본사에서 한국계 기업에 대한 모든 대출을 중단하고 기존의 대출금도 빠른 시일 내에 회수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불가리아에서의 경험은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경제가 왜 국민에게 중요한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제국주의 시대에 정치군사적으로 힘이 없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국민의 수모와 비참함보다 경제적인 몰락 또는 경제적 식민지가 될 때 국민이 겪어야 할 고통은 더 클 수도 있다. 이 시대는 정치적 식민지가 될 가능성은 줄어들었지만, 경제적 몰락과 식민지화는 현재도 상존하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경제의 위기 극복방안과 새로운 성장 동력 찾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국가경제의 몰락과 경제적 식민지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 또한 온 국민이 마음과 뜻을 모아, 지난 한 세대 눈부신 기적을 이뤘던 우리의 잠재력을 다시한번 끌어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세워 나간다면 분명 우리는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권영해 울산창조경제혁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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