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래의 꿈, 장생포

 

고래는 깨어있는 채로 잠을 자고 꿈을 꾼다. 왼쪽 뇌가 잠들어 있으면 오른쪽 뇌가 깨어있고, 오른쪽 뇌가 잠들면 왼쪽 뇌가 깨어난다.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잠을 자고 심지어 뛰어오르는 순간에도 꿈을 꿀 수 있다고 한다. 비록 바다에서 살면서 물고기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는 포유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 밖에서 오래 있을 수도 없다. 육지를 버리고 바다로 들어간 그들의 숙명이다. 고래의 꿈을 좇아 장생포로 향해보려 한다.

갯냄새 가득하던 조용한 어촌마을
러시아·일본 포경기지 건설로 북적
장생포에 부 가져다주던 포경산업
1986년 상업포경 금지조치 후 몰락
고래관광특구 지정 후 부활 날갯짓

‘장생포’(長生浦). 이름만으로 느껴지는 어감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어촌마을일 것이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울산시청에서 15분이면 족히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구 매암동에서 동구 일산동을 잇는 울산대교가 지난해 6월1일 개통된 후엔 동구에서도 15분 내지 20분이면 오갈 수 있다. 여천오거리를 지나 장생포로 들어서는 순간 거리에 드문드문 보이는 고래조형물들이 따라오라는 듯 꼬리 짓을 하고 있다.

 

울산남구문화원에서 발간한 <울산남구지명사>에 의하면 장생포는 장승과 같은 세장(細長)한 포구라 하는데서 왔거나 장승(長丞)이 있었던 포구라고 하는데서 생겨난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 꺼진 먼 바다를 향해 그리운 이를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리운 이와 함께 오래도록 함께 하고픈, 말 그대로 장생(長生)하고픈 염원에서 생겨난 이름은 아닐까.

울산은 1962년 1월27일 각령 제403호에 의해 특정공업지구로 결정·선포했다. 그 일주일 뒤인 2월3일에는 장생포 납도(納島)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가졌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고(故) 박정희 대통령 등이 울산공업지구 지정을 기념해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주)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발파식을 거행했다. 1946년 3월에 개교해 지금껏 장생포 아이들의 꿈을 키워온 장생포초등학교를 지나치니 비릿한 바닷내음이 느껴지고 투박한 뱃고동이 울려온다. 늘 대하는 바다이거늘 파도가 없는 장생포의 바다는 뭔가를 숨겨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듯하다.

▲ 장생포 전경, 장생포고래박물관, 고래바다여행선, 장생포 고래마을에서 바라본 울산대교, 장생포 고래박물관 앞에 전시된 포경선.(위쪽부터)

조용한 어촌마을이 포경의 중심지가 된 것은 19세기말 러시아 포경선이 장생포만(灣)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일반어업과 달리 포경업은 포경선의 정박, 고래해체 등을 위해 육지에 포경기지를 확보해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장생포에 전초기지가 세워지게 되고 본격적으로 포경을 시작하게 된다. 이에 뒤질세라 일본 또한 1900년에 우리정부로부터 한반도연해 포경 특허를 받아 러시아와 더불어 동해바다에서 포경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모든 포경기지를 차지하고 근해의 고래를 마구잡이로 포획했다.

▲ 해방 후 장생포에서는 포경이 재개됐다. 제법 큰 고래라도 잡는 날이면 장생포뿐만 아니라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해체작업을 구경하느라 인산인해를 이뤘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은 그 섬엔 문명이 할퀴고 간 초라한 그 모습.’(가수 윤수일 노래 ‘환상의 섬’ 노랫말 중)

해방 후 장생포에선 다시 포경이 재개되었다. 이번엔 우리 손으로 포경을 위해 힘을 모았다. 일본에 찾아가 목선 두 척을 받아와 그동안 쌓아온 포경 경험을 바탕으로 동해바다로 배를 띄운 것이다. 뱃고동 소리가 울리고 고래 고기 삶는 냄새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선으로 잡을 수 있는 고래는 밍크고래 정도였지만 차츰 규모가 커진 고래산업은 장생포에 부(富)를 가져다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다 참고래라도 잡게 되는 날이면 크고 긴 뱃고동 소리에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해체작업을 구경하러 오면서 장생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먼저 해부장이 고래 위에 올라가 허리춤에 숫돌을 달고 큰칼을 갈아가며 해체 방향을 정하면 해부원들은 덩어리째 잘라내는 일을 했다. 구경나온 사람들의 또 다른 재미는 해체하는 중에 고래 고기를 한 덩이씩 잘라 모인 군중 속으로 던져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고래 고기 맛은 마(그냥) 소고기 육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기라.” 몇몇 어르신들께서 이마에 잡힌 굵은 주름 사이로 당시 세월을 토해내며 말씀하셨다.

 

이렇게 아낌없이 주던 고래는 더 이상은 힘겨웠을까. 1986년 1월부터 고래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IWC(국제포경위원회)에서 상업포경 금지를 선언한 것이었다.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한 고래종의 멸종위기, 그로인한 바다생태계의 파괴를 막고자함에서였다고 한다. 장생포는 갈 곳을 잃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장생포를 떠났다. 그때도 지금도 장생포 앞바다는 그저 물결조차 일렁이지 않고 고요하기만 했다.

고래바다여행선이 손님을 기다리느라 분주하다. 맑게 갠 하늘이 왠지 고래 떼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준다. 요즘 들어 고래 떼를 발견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2008년 8월 장생포일대를 고래문화특구로 지정하고 고래관광산업이라는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그렇게 고래는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장생포에는 고래박물관을 비롯해 고래 생태 체험관, 고래연구소, 고래문화마을 등이 갖춰져 있다.

▲ 장현 문화관광해설사

어느새 고래박물관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관광버스들이 즐비하다. 노란색 원복에 초록모자를 쓴 병아리 같은 어린이집 아이들이 짝지의 손을 꼭 잡은 채 선생님을 따르고 모처럼의 나들이에 꽃 분홍으로 곱게 단장한 어르신들이 상기된 얼굴로 박물관 계단을 오르고 계신다. 30℃를 웃돌던 무더운 날씨는 벌써 기억 저편에 자리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에 장생포의 역사는 계속된다.

장현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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