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롭게 보는 동헌

▲ 조선시대 지방통치를 담당했던 울산 구도심 동헌(東軒)은 지금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가학루(駕鶴樓) 복원과 객사 복원, 시립미술관 건립이 이뤄지면 큰 문화 시너지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박철종기자 bigbell@ksilbo.co.kr

고을살이 즐겁다마오 고을살이 도리어 걱정뿐일세
관아의 뜰은 시끄럽기가 시장 같고 송사 문서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네
가난한 마을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감옥에 가득한 죄수들이 안타깝네
성난 얼굴로 향리를 꾸중하고 무릎 꿇고 왕의 사신에게 인사드리네
신령한 사당에 기우제도 자주 지냈네
잠시도 한가할 때 없으니…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고려 후기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고을살이 즐겁다마오’란 시의 일부분이다.

한 마을의 속관(屬官)으로 재직 시 지은 시로, 고을 수령의 고달픔과 바쁜 일상을 하소연한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한 단체의 수장은 바쁘고 힘들기 마련인가 보다.

이렇듯 바빴던 고을 수장들이 지내던 곳이 전국 곳곳에 남아있는데 바로 동헌(東軒)이라는 곳이다.

조선 초기 배산임수 명당에 건립
임란 전후 소실됐다 1681년 복원
정청·내아·오송정 등 남아있어
시립미술관 건립과 연계할 경우
전통-현대 잇는 시너지 효과 기대

울산에도 있는 동헌에서 근무하다보면 종종 동헌이 무얼 하는 곳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춘향을 심문하던 장소라고 상상해 보자. 칼을 채운 춘향이의 맞은편에서 분을 참지 못한 채 ‘네 이년. 감히 니가 나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말이냐?’면서 핏발 선 눈을 부르르 떨고 있는 변사또를. 혹은 드물긴 하지만 이혼재판도 벌어지며, 백성들의 민원을 탄원하던 곳 그곳이 바로 동헌이다.

현대의 삼권분립과는 조금 다른 행정과 사법의 통치를 동시에 행한 곳이지만 지금의 시청쯤이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울산 동헌의 집무를 보던 정청인 반학헌, 살림집이던 내아의 모습. 원래 두 건물 사이에는 담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출입하던 협문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춘향의 사연을 이야기하다보면 금방 이해가 되고 울산 도심에 이런 곳이 있나 신기해하기도 한다.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 통치를 담당하던 군현(郡縣)의 중심, 즉 20여개의 관청이 모여있던 행정관청의 중심지였다.

조선 개국 후 3대 왕 태종(재위 1400~1418) 대에 이르면 전국 300개의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울산도 조선 초기부터 동헌이 설치되었던 듯 하지만 <울산읍지>(蔚山邑誌) 등의 정황상 임진왜란을 전후로 소실된듯 하다.

지금은 구도심이 되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울산을 관장했던 동헌을 한 바퀴 둘러보자.

동헌이 자리한 중구 교동과 북정동, 옥교동 일대는 당시 성(城)을 쌓아 행정중심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던 곳이 있었다. 바로 울산읍성이다.

1477년께 완공한 울산읍성은 외적으로부터 행정관아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약 1.7㎞ 길이에 달했다.

중요한 입지 조건이었던 풍수지리에 따라 주산인 함월산과 태화강을 전방에 끼고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하면서 배산임수인 이곳이 최적지라는 판단에 따라 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유재란 시 왜군이 지금의 학성공원에 울산왜성을 쌓기 위해 성벽을 허물며 성이 파괴되었다.

▲ 정려각.

그후 울산의 근대화에 따라 도심으로 발전하면서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울산의 대표적인 읍성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집자리, 근처 집들의 벽이 되어있는 성벽돌 등 작은 흔적들을 놓치지 않은 시민단체, 학계, 행정기관의 노력으로 그 흔적을 따라 탐방길이 조성돼 있다.

그 속에는 우물터, 감옥터, 성문지 등 다양한 흔적들이 있으니 시계탑을 중심으로 안내판을 따라 옛 성벽을 한번 상상하면서 걸어보자.

그리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옛 성안의 장면을 마치 타임머신을 탄듯 증강현실(增强現實, Augmented Reality, AR)처럼 상상의 영상을 띄워 보자.

쭉 이어져 있는 관청과 오가는 사람들, 곤장을 맞고 있는 사람, 시장으로 소금이나 옹기를 지고와서 팔던 등금장수와 옹기장수, 태화강에서 나던 해물과 바지락, 재첩 등을 파는 장면들이 둥실둥실 우리의 감회를 자극하지 않을까.

문화 콘텐츠는 역사, 문화의 흔적이 그 자원이 된다고 하니 그 상상의 주역도 역사문화 흔적인 것이다.

읍성 가운데 관청의 중심이었던 현재의 동헌을 살펴보자.

임란 이후 1681년 부사 김수오(金粹五)가 복원하면서 ‘일학헌’(一鶴軒)이라 걸었던 현판을 1763년 부사 홍익대(洪益大)가 ‘반학헌’(伴鶴軒)이라 새로이 걸었다. 유독 지명에 학(鶴)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울산을 학성(鶴城)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헌은 관무를 보던 정청(政廳)과 살림집이던 내아(內衙), 울산 최초의 생원이자 대표적 효자였던 효자 송도(宋滔)의 정려각(旌閭閣)이 자리잡고 있다. 북구 효문동의 지명은 본래 효자 송도가 있었다 하여 유래되었다 하며 중구 우정동에서 2006년 옮겨온 것이다.

또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가 되고 있는 ‘오송정’(五松亭)이라는 정자와 그 뒤쪽으로 울산을 거쳐간 부사, 병마절도사, 암행어사 등 31기의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울산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왜군의 이동경로에 위치한데다 두 군데의 왜성이 있어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피해가 극심했다. 많은 의병의 항전이 있었다하여 울산군에서 울산도호부로 승격됐고 울산 군수도 도호부사로 직책이 높아졌다. 임란 이후는 부사로 기록되고, 병마절도사의 비석도 보이는 것은 병영성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주둔했기 때문이다.

또 이도재(李道宰, 1848~1909)라는 암행어사의 비(碑)도 보인다.

울산과 관련된 다양한 이력을 남긴 관리로, 울산에 암행어사로 온 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남긴 것이라고 전한다. 1899년 조선과 러시아가 장생포 포경기지 협약을 체결할 때는 막후교섭을 중재했던 인물이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 남쪽의 매바위(일명 어사암)에 그의 이름을 새긴 석각이 남아 있다.

중구 태화동의 동강병원 응급의료센터 벽면에도 이런 성격의 비석 하나가 서 있다. 18세기에 울산에 부임했던 윤지태(尹志泰) 부사의 선정비인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임란 이후 울산도호부에 부임한 180여명의 부사 중에 객사를 수리하는 등 선정을 베풀고 ‘울산의 솔로몬’ ‘부사의 명판결’로 유명한 인물이다.

잠깐 그 사연을 살펴보자.

자식이 없는 늙은 옹기장수가 깨진 옹기 옆에서 낙담하고 있을 때 마침 윤 부사는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윤 부사는 다음날 아침 동면에 살던 넉넉한 두 어부를 같이 동헌으로 불러 한 어부가 돛을 달아 동풍을 빌리고 한 어부는 서풍을 빌려가다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만 옹기가 깨져 버렸으니 배상을 해주라고 판결을 내려 명판결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한다.

요즘의 잣대로는 비과학적인 판결이겠지만 당시 가난한 옹기장수에게 조금이라도 보상을 해주려던 부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렇듯 동헌은 한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부였던 동시에 사법부로서의 기능도 한 곳이었고 객사와 함께 한 고을을 대표하는 중심부였다.

지금 동헌은 새롭게 태어나려 한다.

▲ 박혜정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전통 혼례식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고 있는가 하면 입구에 북과 나팔을 보관하며 정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가학루(駕鶴樓)를 복원할 예정이다.

새로 복원될 객사와 어우러지며 첨단시설로 건립될 시립미술관과 함께 어마무시한 문화의 시너지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전통은 현대와 소통할 때 시공간을 뛰어넘는 조우가 이뤄지고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고 한다.

도심속 동헌과 울산읍성을 한 바퀴 돌아보며 지금 우리 앞에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치며 우리의 전통적 마음가짐을 한번쯤 돌아볼 수 있는 가을이 되었으면 한다.

박혜정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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