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200여년 5대의 화맥, 운림산방

▲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안에 있는 운림지. 조선의 대표 화가 소치 허련에서부터 고손자 오당 허진까지 일가 직계 5대가 20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온 남종화맥의 뿌리다. 배우 배용준과 전도연, 이미숙이 출연한 영화 ‘스캔들’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남도땅 진도. 누군가는 ‘목이 잠긴 채 불러보는 고향’과 같다고 했다. 그 곳은 고려와 조선시대 단골 유배지였다. 지리적 특성 탓에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수많은 명인과 선인들이 그 곳에서 질곡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가고 없으나 그들이 남긴 멋과 흥은 시·서·화·창의 찬란한 남도문화로 여전히 그 곳을 지탱하고 있다. 현대화와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내륙의 전통문화는 퇴색됐지만, 진도땅만큼은 자타가 인정하는 역사와 예술의 고장일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
추사 타계후 고향 내려가 운림산방 조성
일가직계로 조손대대 8명의 화가 배출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진도군청의 숙원
매주 토요일 지역작가 작품 즉석경매도

◇남도미술의 정수, 운림산방

아름다운 진도에서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이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운림산방은 주변에 안개가 내려앉는 일이 잦았기에 붙여졌다. 아담한 화실, 잉어가 노는 연못, 단정한 초가 살림채가 첨찰산을 병풍 삼아 볕 좋은 자리에 들어서 있다.

이 곳은 남종화의 대가이자 시·서·화에 능했던 조선의 대표 화가 소치 허련(1808~1893)이 말년에 거처하며 후학을 키우고 여생을 보낸 거처이자 작업실이다. 지난 1982년 소치의 손자 남농(南農) 허건이 복원 기증했는데, 지금은 국가지정 명승 제80호이자 전남도 기념물 제51호로 보존되고 있다. 이 곳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술사적 성지로 평가되는데는 허련에서부터 그의 아들인 미산 허형이 2대, 그의 아들인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이 3대,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이 4대, 그리고 남농 허건의 손자인 허진까지 5대에 걸쳐 화가로 이름을 떨치는 등 일가 직계 5대가 200여년 동안 그림을 그려 온, 큰 화맥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 운림산방 전면.

허련은 1808년(순조 8년) 진도에서 태어나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에게 그림을 배웠다. 허련의 재능을 알아본 초의선사는 절친한 친구이자 당대 시서화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에게 허련의 그림을 보여줬고, 이를 본 추사는 주저없이 허련을 서울로 불러 제자로 삼았다. 이때부터 허련은 추사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추사에게 글과 그림을 배웠고, 추사 역시 허련을 지극히 아껴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허련은 한양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헌종이 허련을 궁으로 불러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1857년 추사 타계 이후 허련은 한양의 명성을 뒤로한 채 고향 진도로 내려가 운림산방을 조성해 35년을 더 살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 집에서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레 남종화의 본거지가 됐다. ‘진도에서는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거나 ‘허씨들은 빗자루나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모두 이들 양천 허씨 일가에게서 유래됐다.

현재 운림산방을 지키는 문화해설사 허상무씨도 그 집안 사람이다. 그는 막힘없이 쏟아내는 청산유수 말솜씨로 남종화는 무엇이고, 소치는 누구인지, 운림산방이 왜 진도여행 1번지가 됐는지 등 남녀노소 관광객이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원하게 궁금증을 풀어준다.

운림산방은 이런 내력을 알고 가야 구석구석 더 잘 보인다. 이 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영화 속 뱃놀이 장면에 등장하는 이 곳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연못 가운데 둥근 섬에는 소치가 심은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이 곳의 현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소치의 방손으로 남종화의 마지막 대가라 일컬어지는 의재 허백련의 글씨다. 산방의 뒷편 살림집에서는 이곳에서 미산과 남농이 태어났었고, 어린시절의 의재 또한 그 곳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 재치 넘치는 입담의 허상무씨.

◇5대(代) 화맥, 세계문화유산등재 추진

운림산방 화맥의 4대(代) 작가 임전 허문(74)이 2년여 전 서울 인사동에서 ‘붓질오십년’이라는 회고전을 펼쳤다. 전시를 앞둔 임전은 당시 “운림산방이 만약 3대째 만두만 빚어도 요란법석을 떠는 일본에 있었다면, 벌써 유네스코에 선정돼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거듭났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 가문에서 일가직계(一家直系)로 조손대대(祖孫代代) 화맥을 이어가는 ‘살아있는 미술관’은 운림산방 뿐”이라면서 200여년간 5대에 걸쳐 8명의 화가를 배출했고 6대까지 장대한 화맥(畵脈)을 품은 운림산방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야 하는 이유”라고 했단다. 운림산방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조심스레 호소한 것으로, 전시의 부제 역시 ‘이제는 유네스코로’였다.

그것이 단초가 돼 지금은 아예 진도군청의 숙원사업이 되고 있다. 운림산방 곳곳에는 관련 강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고, 각종 선물까지 제공하겠다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 운림산방 옆 소치기념관 관람객들.

◇토요경매에서 가볍게 그림 한 점!

만약 이 곳을 토요일 방문하게 된다면, 그림을 즉석에서 사고파는 ‘토요경매’에도 참여할 수 있다. 전남문화예술재단이 운영하는 토요경매는 10년 전 시작된, 이 곳만의 미술장터다. 광주·전남지역의 신인·중견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나온다. 지난 달 추석맞이 특별경매에서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광주시전, 전남도전의 특·입선 수상작가들이 작품을 내놓았고, 최대 70%까지 할인하는 행사도 마련했다. 소품은 5만~7만원 선에도 판매된다. 이렇듯 경매가 열리는 날을 택해 일부러 이 곳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면서 현재는 진도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매 수익금은 다시 지역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는 데 쓰인다.

글·사진=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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