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크로아티아에서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손만 흔들면 어디서나 세워줄 것 같은 완행버스는 이름 모를 시골동네들을 수없이 들르며 해안도로를 달려간다. 아드리아 해변은 우리네 남해안과 같은 리아스식 해변과 수많은 섬으로 장식되어 있다. 구불거리는 해안도로와 에머랄드 빛 바다, 그리고 올망졸망한 섬들이 그려내는 풍경은 그대로 한려수도의 여러 장면과 겹쳐진다.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섬들과 내륙 깊숙이 들어앉은 바닷물은 호수처럼 잔잔한 만을 형성하여 천혜의 항구를 품어준다. 지중해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여러 민족과 국가들에게 바다로 드나들 수 있는 항구는 교역을 위해서나 전쟁을 위해서나 존망이 걸린 핵심적인 시설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요새와 같은 성곽도시가 만들어졌고, 다양한 시대와 문명과 조우하면서 도시의 연륜을 축적시켜왔다.

크로아티아 중간쯤서 만난 ‘트로기르’
미로처럼 얽혀진 도시의 긴 골목길
낡은 건물들과 크고작은 상점의 변주는
관광객의 호기심 자극하기에 충분
도시가 유기체라면 골목은 실핏줄
도시의 지속성 위해 골목은 지켜져야

남북으로 길게 뻗은 크로아티아의 중간허리에서 트로기르(trogir)와 만난다. 크로아티아 본토와 치오보 섬 사이에 끼어 있는 이 섬은 마치 울돌목을 지키던 조선수군처럼 군사적 요충지였다.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이 도시를 요새화하면서 항구도시로 발전시켰다. 로마는 이 땅에 직교형 가로망과 초기 기독교시대의 건물 등 도시의 근간을 남겨주었다. 비록 도시규모가 산책거리에 불과하지만 트로기르는 헬레니즘 양식과 로마 양식의 건물이 남아있는 중세 도시의 완벽한 사례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가장 소중한 유산은 미로처럼 얽혀진 골목길이다. 섬의 주변부만 차량통행이 가능한 순환도로이고 내부는 온전히 도보전용의 좁은 골목길로 구성된다. 거친 돌바닥은 수 백년 세월의 발길을 견디며 매끈하게 포장되어 버렸다. 골목의 폭도 제멋대로 들쑥날쑥하여 좁은 곳은 1m에도 못 미친다. 또한 휘어지고, 꺾어지고, 막힌 듯 연결되면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숨겨진 낯선 풍경들이 관광객의 호기심을 유혹한다. 어깨를 스치고 다녀도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미세한 표정과 숨소리, 특이한 체취가 느껴진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친밀감이 큰 법이다.

좁은 골목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광장이 권력자의 의례적 공간이라면 골목은 서민들의 일상적 삶의 공간이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연을 간직한 낡은 건물들과 신기한 토산품을 파는 작은 상점들, 향토음식의 맛집들, 아늑한 민박집 마당이 그려주는 신기한 풍경을 따라 하염없이 걷게 만든다. 주민들의 독특한 말투와 이상한 몸짓하나도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그것은 좁은 장소에 많은 풍경을 감추어둔 요지경이며, 마법사들의 신기한 상점들이 숨겨져 있는 해리포터의 다이건 앨리(Diagon Alley; 마법사들의 거리)처럼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떤 문화유산도 이처럼 서민들의 삶과 밀착시킬 수 없을 것이다.

베고니아 향기가 그윽한 골목 안 찻집에 앉아 종로 뒷골목의 향수를 더듬어 본다. 무교동 낙지골목, 청진동 해장국 골목, 피맛골 등 미로처럼 얽힌 길이지만 지금이라도 지도로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양반세도가들의 가마를 피해 다니던 길에서 피맛골이 형성되었듯이 골목은 언제나 서민들의 공간이었다. 좁고 어둡고 퀴퀴한 뒷골목, 노상방뇨와 밀회의 단골장소인 전봇대, 술꾼들의 시끌벅적한 수다가 매콤한 낙지볶음 향에 버무려 지던 곳. 그 골목길에 달려 살아가던 작은 술집들과 주모의 넉넉한 인심과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들. 그곳은 거대도시에서 삶에 지친 서민들을 보듬어주던 마지막 안식처였다.

2000년대 이후 재개발 바람은 서울의 중심에서 서민의 공간을 밀어내고 말았다. 불량한 도시건축물로 분류된 작은 건물들이 철거되고 높고 세련된 고층빌딩들이 들어섰다. 불량한 골목들 대신 시원스럽게 뻗은 ‘신작로’들이 교통의 편리성과 토지이용의 효율성을 달성해주었다. 그러나 그 ‘빛나는’ 신작로는 서민들을 품어주지 못했다. 밤이 되면 그 거리는 경비원들만이 지키는 유령의 공간으로 변모해 갔다. 그것은 공간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시의 중심에서 자본이 사람을 밀어내고, 경제성이 감성을 몰아낸 것이다. 나아가 그 골목의 감성을 기억하는 세대와 그 이후 세대 간에 도시공간에 대한 기억과 공감의 단절을 초래했다.

도시가 유기체라면 도로는 핏줄이다. 간선도로가 대동맥이라면 골목은 실핏줄이다. 피를 잘 통하게 하려고 실핏줄을 굵게 만든다면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가 없다. 골목과 가로와 도로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도시기능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살맛나는 감성적 도시공간을 위해서도, 시민계층의 다양성과 공존을 위해서도, 도시의 지속성을 위해서도 골목은 지켜져야 한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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