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꿈을 품은 고래문화마을

▲ 울산 남구 장생포고래로 271-1에 조성된 고래문화마을은 1960~1970년대 고래산업이 번창했던 장생포의 모습을 재현한 곳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자 교육의 현장이다. 고래문화마을 장생포 옛마을 전경. 울산 남구 제공

‘현대사회에서 복고(復古)는 하나의 트렌드이자 빼놓을 수 없는 마케팅의 유형이다. 추억을 소비하고 그 과정에서 위로 받는 감성코드인 복고는 새로운 현상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트렌드라 할 수 있다. 스트레스, 고독, 치열한 경쟁, 실업,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이 과거의 추억을 통해 편안함을 얻고 즐거웠던 기억에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선민 ‘대중가요 리메이크와 복고’-

고래산업 번창했던 1960~70년대 모습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에 그대로 재현
고래광장·놀이터 등 다양한 시설과
10분 남짓한 거리엔 고래문화마을도
옛추억과 향수 선사하는 교육의 현장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2015년에 조성된 울산 고래문화마을은 예전 장생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전체 10만2705㎡의 면적에 고래광장, 장생포 옛마을(23동), 선사시대 고래마당, 고래조각공원, 야외무대, 고래이야기길, 고래놀이터, 수생식물원, 주차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래문화마을은 고래박물관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 표지판을 따라 골목길로 접어드니 한눈에 봐도 세련돼 보이는 울산항만공사(UPA)의 건물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 올라가니 고래문화마을 중 장생포 옛마을이 나왔다. 1960~1970년대 고래산업이 번창했던 장생포의 모습을 재현한 곳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자 교육의 현장이다.

▲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전경. 울산 남구 제공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스피커에서는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구수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오후의 따스한 햇볕에 녹아내린 바람을 타고 달콤한 달고나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가슴은 이미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어스름해질 무렵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놀던 그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옛마을 내 우체국에서 교복을 빌려 입은 중년들끼리 주위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사진을 찍느라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모임인가 보다. 배도 나오고 귀밑머리는 희어졌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웃음소리만은 예전 그대로다.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일 뿐이다’라는 법정(法頂)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서점과 다방, 전파사와 이발관이 나오고 3대째 내려온다는 정자 명물 참기름집도 나왔다. 선물용 참기름을 사들고 나오는데 문방구 앞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연탄이 보인다. 예전 문방구나 연탄가게 주인들은 외지에서 와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아마도 장생포에 오면 돈을 벌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그만큼 장생포는 사람들에게 꿈을 품게 하는 곳이었다. 계단을 오르니 포수의 집도 보이고 해부원의 집도 보였다. 밍크고래 정도는 배에서 해체가 가능했지만 큰 고래를 잡으면 육지까지 끌고 와야 했다. 나이 들어 배를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 경험을 살려 해체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장생포초등학교로 꾸며진 곳에서 풍금소리가 들려왔다. 뜻밖의 행운에 감사드리며 한 곡을 더 청해 들은 후 학교를 나와 정자에 앉았다.

▲ 장생포 문화마을(고래뱃속 체험). 울산 남구 제공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정자에 앉았을 때 따스했던 바람은 기운을 잃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 속에 실려 나지막이 시작되었다. 부친이 포수였다는 그녀의 집은 바다와 맞닿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태생적으로 부지런했던 아버지께서는 배를 타지 않는 날이면 바다를 조금씩 조금씩 메워 집 앞마당은 그만큼 커져갔다고 한다. 온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가하면 빨랫줄을 사이에 두고 농구를 하던 코트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큰 파도가 치거나 태풍이 올 때는 배를 대는 등 마당의 용도는 무궁무진했다.

큰 키에 넓은 가슴을 가진 아버지는 그녀에게 있어 또 하나의 바다였다. 그런 아버지 덕에 늘 질 좋은 고래 고기가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지아비에 걸맞는 사람이었다. 올망졸망한 6남매와 시어른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세 시동생까지 대가족의 큰살림이 힘들만도 했으련만 고단한 내색,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다고 한다.

고래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동네사람들을 챙기는 일도 한결같으셨다. 때문에 이집 저집 고래 고기를 날라야 하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고 그때마다 이웃집 개에게 쫓겨다니는 일 또한 그녀가 감내해야만 하는 일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녀의 추억담을 듣는 내내 ‘장생포에선 지나가는 개도 시퍼런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입안을 맴돌고 반백이란 세월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구김하나 없는 그녀의 성품은 윤택했던 그녀의 어린 시절을 짐작케 해주었다.

시계바늘은 오후 6시를 향해가고 농익은 하늘과 깊게 영근 삶을 벗 삼아 수생식물원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산책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만남, 교감, 갈등, 재회, 공존, 추억을 테마로 한 장생이와 엄마고래이야기 길을 지나고 실물 크기의 고래조각공원에 이르렀다. 밍크고래, 귀신고래, 혹등고래, 향고래, 대왕고래, 범고래 등 여섯 고래를 만날 수 있었다. 이색체험을 위한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옛날 주전동의 한 어부가 전마선을 타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전마선은 큰 배와 육지 또는 배와 배 사이의 연락을 맡아 하는 작은 배다. 그런데 갑자기 물결이 일기 와작하더니 난데없이 큰 고래 한 마리가 다가와 순식간에 큰 입으로 배와 어부를 삼켜버렸다. 고래 뱃속에 들어간 어부는 어떻게 하든 살기남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어구를 손질하던 칼로 있는 힘을 다해 뱃속을 긋기 시작했다. 고래는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을 쳤다. 얼마 후 고래는 죽었는지 조용해졌고 바닷물이 들어왔다. 어부는 있는 힘을 다해 육지로 나왔고 동네사람들에게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래가 죽어 바다에 떠있을 거라 생각한 동네사람들과 어부는 고래를 찾아 육지로 끌어올렸다. 그 고래는 초가삼간 다섯 채를 합친 것보다 컸다. 어부가 고래를 팔아 논을 사자 사람들은 이 논을 고래논이라 했다. 울산 북구 주전동에 내려오는 설화이다.

▲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멀리 울산대교의 불빛이 보이고 산책길 곳곳에 마련된 포토 존엔 순간의 아름다움을 부여잡으려는 듯 사각의 틀에 자신들을 밀어 넣는 연인들도 눈에 띄었다.

마지막으로 중국풍 휴식공간인 중국 요양시 백탑공원에 들렀다. 지난 3월 준공한 백탑공원은 울산 남구와 중국 요양시가 우호협력 관계를 높이기 위해 조성했다. 짧지만 운치 있는 오죽 길을 걸어 안으로 들어가니 요양시에서 직접 제작해 기부한 백탑 미니어처가 있었다. 방을 옮겨가듯 옆으로 가니 오랜 세월을 이겨낸 수양회화나무가 서있고 물속엔 떠나가는 가을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수련이 애잔하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땀방울이 등에 살짝 맺혔다. 11월 늦가을 저녁 바람이 가슴 밑바닥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리곤 속삭인다. 오늘도 더할 나위 없었다고….

장현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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