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울산의 품격 태화루

▲ 태화루(太和樓)는 신라 선덕여왕~진덕여왕대 647년께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태화사(太和寺)의 종루(鐘樓)였다. 촉석루, 영남루와 함께 영남의 3대누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1990년대부터 의견수렴을 시작해 2014년 4월에 복원된 태화루.

신라 선덕여왕(632~647) 시기,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 오대산 태화지(太和池)를 지나다 신인(神人)으로 화한 보살과 마주쳤다. 자장은 신라의 유학파 최고 엘리트였고 당대(唐代)에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던 길이었다.

신인은 “너희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황룡사 호법룡을 위해 9층탑을 세우라. 그러면 주위의 아홉 나라가 조공을 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아곡현(阿谷縣) 남쪽의 황용연을 지키는 자신의 아들인 용의 식복을 위해 절을 지어달라고 당부했다. 자장은 신인이 사라지고 난 뒤 당나라 황제로부터 선물 받은 부처의 진신 사리와 가사를 갖고 와 통도사와 황룡사 탑, 태화사 등 3곳에 나눠 안치했다. <삼국유사>의 탑상(塔狀)편 황룡사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설화로 전해지는 것이지만, 당시 신라사회는 삼국통일 전쟁과 내홍 등으로 어지러웠던 시기에 9층탑과 왕경 주변에 큰 불사를 행함으로써 사기진작과 단결을 강조했을 것이다.

먼저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황룡사 9층탑은 645~646년께 완공됐을 것으로 보인다. 중간에 심주(心柱)를 중심으로 목재의 결구 방식으로 지어올린 것인데, 복원을 준비 중인 현재도 당시 공법대로 건립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높이는 사용한 척(尺)도에 따라 67~82m로 추정되며 이는 아파트 22층이상이 되는 거탑이었다. 울산 문화수준 가늠하게 했던 ‘태화루’

선비들이 남긴 시문만 100수에 이르고
고려 성종도 방문해 연회 베풀던 장소
임진왜란 거치며 소실된 것으로 보여
시민들 노력에 기품있는 양식으로 복원
전통과 소통하는 공연장소로 자리매김

1967년 발굴 당시 바닥 구조물을 확인했으나 돌과 흙을 섞은 흙다짐 이외에는 특별한 공법이 없어 9층이나 되는 목탑을 어떻게 올렸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라 한다.

각층마다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거란, 여적, 예맥 등 신라 주위 아홉 나라의 이름을 붙였다. 탑이 완공된 후 그 나라에도 신라의 빛이 비치기를, 즉 통일의 꿈을 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신라는 90년 동안 지어진 절과 이 탑의 완공 30년이 채 되지 않아 삼국통일을 완성해 황룡사를 통한 단합과 통일 여망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 태화루 현판

황룡사 9층탑은 몽골의 2차침공이 진행되던 1238년 전소됐다. 당시 구전기록에 의하면 절이 워낙 커 보름동안이나 탔는데 그 연기가 서라벌 하늘을 한 달 동안이나 뒤덮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국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조선조에 쭉 중수가 이뤄진 것과는 달리 중건되지 못했다.

황룡사 탑과 비슷한 시기인 선덕여왕~진덕여왕대 647년께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태화루(太和樓)는 태화사(太和寺)의 범종을 걸어놓은 종루(鐘樓)였다.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아곡현 남쪽에 용의 식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태화사는 멸실 시기가 명확치 않으나, 태화루는 <울산읍지> 등의 정황상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멸실한 것으로 보인다. 태화루 건립을 위해 실시한 발굴조사와 고지도 등을 보면, 태화사는 현재 동강병원 근처로 보이며 여기에 딸린 누각이었던 태화루는 지금의 장소와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태화사 멸실 후 태화루는 그 성격이 달리한다. 고려, 조선을 거치며 종루가 아니라 고을의 대표적 정치 토론장소로, 고을 문화를 향유하는 곳으로 바뀌어간 듯하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근간으로 삼았다. 유학의 정신교육과 선현에 대한 배향을 행하는 서원(書院)이 없으면 상놈의 고을이라 하여 무시를 받았다. 한 고을을 대표하는 누정의 시문과 풍류는 그 고을의 수준을 나타내는 최고의 문화 향유의 장이었다.

태화루는 단순한 누각이 아니었다. 고려, 조선을 거치며 울산이라는 고을의 수준을 가늠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태화루에 관한 시문이 거의 100수에 이르렀고 고려 성종도 이곳을 방문해 연회를 베풀었다 한다.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서거정(徐居正) 등 당대에 글 좀 한다는 선비들은 모두 태화루 경치를 극찬하며 시문을 남겼다. 조선 태종의 장인인 민제(閔霽)도 쇠락함을 걱정해 경상도안찰사에게 부탁하는 등 여러 차례 수리가 이뤄졌다할 정도였다.

▲ 태화루 전경

임진왜란 후 태화루는 멸실되었다. 이후 당시 울산의 시정 백과인 <학성지>(1749)나 임필대(任必大)의 <유동도록>(遊東都錄)에 의하면 태화루 자리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웠고 이로해서 태화루는 복원되기가 힘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다. 조선의 주례 고공기(周禮 考工記)에 의한 건축형태는 좌묘우사(左廟右社). 동헌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을 제사지내는 향교의 대성전을,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하는 것이 기본 모티브였다. 원래 울산 향교는 반구동 일원에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 교동으로 옮겨져서 방향이 바뀐 것이다.

연구자들의 발굴 결과 지금의 태화루 일원이 곡식신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태화루는 고려 말에 지목된 울주8경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아름다운 태화강을 끼고 황룡연 언덕 위 어디서든 조망이 가능한 울산의 대표 명승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안타깝게 사라진 후에 우리 선조들이 사랑한 태화루는 다시 살아났다. 1667년 유지립(柳之立) 부사에 의해 객사를 복원하며 남쪽 문에 해당하는 남문루에 그 현판을 ‘태화루’라 걸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찍은 사진을 보면 남문루에 시장이 열리고 있고 그 뒤에 태화루 현판이 뚜렷하게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객사인 학성관 자리에 울산초등학교를 건립하며 태화루는 도서관으로 사용하다 1940년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 이후 현판은 학성이씨 가문의 정자인 이휴정(二休亭)에서 보관해오다 지금은 울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새로 복원된 태화루 현판은 이를 모사 확대해 편액하고 있다. 이 현판을 바탕으로 태화루는 민, 관, 학계, 경제계의 노력과 최고의 기술진이 합세해 2014년 복원되었다.

1만138㎡의 부지에 세워진 누각은 영남루보다 조금 넓다하며 혹자는 촉석루, 영남루와 함께 영남의 3대누각이라 하기도 한다. 시민들의 노력으로 돌아온 태화루는 기품 있고 화려한 주심포 양식이며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당시 건축기록이 없어 가장 번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건축물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라지만 사실 여기에도 우리 민족의 아픔이 들어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은 경북 안동시 봉정사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본다. 고려말 건축물로 그 이전의 건축물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웃 일본 오사카의 법륭사 5층목탑이 6세기 건축물임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중국은 전탑(塼塔)의 나라, 일본은 목탑(木塔)의 나라, 우리나라는 석탑(石塔)의 나라라고 한다. 한 나라의 문화재는 그 나라의 지리적인 환경에 의한 풍부한 물산을 이용해 주로 만들어진다. 중국은 황하유역의 풍부한 흙을 이용한 벽돌기술이, 일본은 목재의 질이 좋아 목재기술이 각각 발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돌이 많고 특히 화강암이 풍부해 돌로 만든 불상, 석탑 등이 중요문화재이기도 하다.

석탑 이전에 문화의 성격상 건축기법도 이동했을 것이고 전탑, 황룡사 구층탑을 비롯해 미륵사지 목탑 등 일본보다 훌륭한 목재 건축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침(外侵)이 잦았던 탓에 목재로 만들어진 것들은 대부분 불에 탔다. 예로 병자호란 때 청군은 태울 수 있는 것은 다 태우고 지나가라 했다니 병화(兵火) 이후의 모습은 말이 필요 없다. 그리하여 황룡사 9층탑 모형은 당시 자료가 없어 일본 법륭사 5층탑 등과 남산의 마애불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하니 우리 역사 이면의 그림자인 것이다.

▲ 박혜정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또한 당시 수도 서라벌만이 아니라 양산 통도사와 울산 태화사를 건립한 것은 이 지역이 신라의 외항으로, 신라 입장에서 왕경 즉 수도권지역에 포함시킬 정도로 중요한 입지가 아닐까 추측이 가능하다. 이제 태화루는 우리 앞에 서 있다. 1990년대부터 의견수렴을 시작해 2014년 4월 완공돼 시민들에게 역사문화적 자부심과 십리대밭의 경관과 함께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전통과 소통하는 문화 공연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기서 관람 팁 하나. 태화루에서 지나치기 쉬운 중요한 비석 하나가 전시관 입구에 서 있다. ‘참봉 이만령 영세불망비’라고 적힌 낡은 비석이다. 이만령(1708~1784)은 당시 유곡동에서 흘러내려 태화강과 합쳐지는 강순내라는 천(川)이 자주 넘치자 백성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홍교(虹橋)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져 그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있는 듯하다. 인간은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남는다고 한다. 하나의 문화건축물이 도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빌바오(Bilbao) 효과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며 남겨진 많은 시문들처럼 한번쯤은 태화루에 올라 시인묵객도 되어보자.

명품은 사람이 만들고 시간이 완성한다고 한다. 우리가 볼 수 없을지라도 지금 복원된 태화루도 세월과 함께하며 명품이 되기를 바라본다.

박혜정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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