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백두대간 제29구간
(복성이재~아막성터~새맥이재~사치재~유치재~고남산~여원재)
거리 20.0㎞, 시간 8시간15분 - 산행일자 : 2016년 7월24

▲ 복성이재에서 작은 메를 넘으면 뒤이어 비교적 석성의 흔적이 뚜렷한 산성을 지나게 된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이었던 아막성(阿莫城)이란 곳이다.

전북 남원시 아영면, 인월면, 운봉읍은 산간협곡에 갇힌 지형이다. 그러나 해발 400m에서 600m 정도 높이의 구릉지에 한 개의 읍과 두 개의 면이 서쪽은 백두대간, 동쪽은 지리산 자락과 나란히 고원을 형성하면서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결코 협곡처럼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복성이재에서 산행을 출발해 여원재로 가면서 진행방향 왼쪽 시야가 트이는 곳마다 너른 들판과 마을이 목가적으로 열린다. 지리적으로는 심산유곡인데 산자락에 기대어 펼쳐진 고지대 평원이 천혜의 길지(吉地)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이 산꾼들의 눈길을 자꾸 끄는 곳이다.

기득권 놓지않는 양반층에 항거
동학농민군 이곳에서 괴멸 당해
지금은 정비된 88고속도로 위치
민초들 아픈 역사 반복않길 바라

복성이재에서 오전 6시50분에 산행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푹푹 찌는 무척 더운 날씨. 이 하루도 뜨거운 날보다 더 뜨거운 열정과 돌아봐지는 고원지대의 확 트인 풍광을 위안삼아 산길을 열어간다.

복성이재에서 작은 메를 넘으면 뒤이어 비교적 석성(石城)의 흔적이 뚜렷한 산성을 지나게 된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이었던 아막성이란 곳이다. 성벽은 세월 앞에 곳곳이 무너졌고 숲이 성을 덮고 있다. 지리적으로 신라와 백제 상호간에 가장 진·출입이 용이한 곳으로서 첨예하게 두 나라가 대립했던 곳이란다. 과거 만만치 않았을 아막성 위용은 사라지고 없지만 돌 하나하나에 이끼처럼 스며들었을 옛사람들의 아픔은 아직도 남아서 후세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 고남산은 백두대간 상의 작은 산이지만 폭염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이번 구간은 산행 초입의 아막성터 지역을 벗어나면 사치재를 지나 매요마을까지 산행을 이어가기에 대체로 수월한 지형이 계속된다. 광주~대구고속도로(옛 88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사치재는 그동안 절개가 되어 고속도로 하부 도로를 따라 대간 길을 잇게 되어 있었으나 4차로로 확장되면서 절개지를 복원하고 생태이동로가 만들어졌다. 대간의 축을 회복시켜 놓은 것이다.

산을 절개해서 도로를 내던 그간의 토목공사 방법에서 벗어나 이제는 터널을 뚫어 산을 관통하거나 불가피한 곳은 콘크리트 터널을 만들고 위에 흙을 덮어서라도 자연생태계를 연계시켜주는 방법으로 공사를 하고 있다. 이나마도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방법으로 정착되는 것 같아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적한 고속도로 위 사치재 그늘에서 재를 넘어가는 바람을 쐬며 쉬어간다.

▲ 사치재에서 고남산 방향으로 가려면 운봉리 매요마을을 통과해야 한다.

사치재에서 고남산 방향으로의 진행은 618봉을 넘고 운봉과 장수를 잇는 743번 지방도를 잠시 걷게 되고 운봉 매요리 마을을 통과해야 한다. 매요마을에 도착하면 느낌상으로는 고도를 많이 낮춘 평야지대에 내려선 것 같지만 마을이 해발 420m에 위치하니 높이로는 내륙의 웬만한 산 능선에 올라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산길을 걷다가 도로와 마을길을 접속해서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많이 여유로워진다. 산에서는 현실적으로 얻기 어려운 식수와 음식 그리고 응급상황 등의 변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매요마을의 매요휴게실은 백두대간 상에 단 하나뿐인 구멍가게다. 번듯하게 규모를 갖춘 휴게소는 백두대간 요충지 곳곳에 있다. 그러나 민가에 간판을 걸고 오가는 대간꾼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휴게실 마당 나무그늘에 둘러앉아 라면을 시켜놓고 열을 식힌다. 그 모습이 마치 농번기에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새참을 먹는 풍경과 같다.

매요마을은 휴게실 앞으로 폐교가 되면서 황폐한 모습을 한 학교건물 말고는 모든 게 넉넉해 보이는 모습이다. 일요일이라 성가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매요교회도 어깨를 넓게 편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평화롭고, 마을 한가운데 있는 넓은 공터에 마을회관과 보건진료소, 어르신들 쉼터도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어느 세월에 아이들이 다시 폐교가 되어버린 저 학교에서 뛰어놀기만 한다면 풍요와 평화가 완벽하고 아름답게 어우러질 것 같은 마을이다. 휴게실 주인할머니께서 내어놓으신 잘 익은 김치와 함께 라면 한 그릇을 새참 먹는 기분으로 맛있게 먹고 오늘 산행의 정점 고남산을 향한다.

 

고원분지 가운데 유난스러울 정도로 뾰족이 솟아올라 있어 남쪽의 높은 산이란 뜻을 가진 고남산(高南山 해발 846.4m)…. 이미 무수한 산들을 찾아들었던 산꾼들에게 고남산은 그저 백두대간 상에 있는 또 하나의 산일뿐 마음에 특별히 부담으로 다가올 리 만무한 산이다. 그러나 기관에서 보낸 폭염경보를 개인휴대폰으로 모두 받았을 정도로 뜨거운 날, 고남산 오름은 더위와의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오전 11시께 매요마을을 출발해 낮 12시를 넘길 무렵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는 고남산정에 들었다.

산정은 바람기 없이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후끈거렸다. 사방으로 돌아봐지는 풍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산정은 협소하고 작렬하는 태양을 피할 곳이 없다. 서둘러 여원재 방향으로 내려서는 등로 나무그늘로 피신을 해서 더위에 대비해 가져온 얼음물로 몸의 열을 식혀본다.

 

고남산에서 여원재까지는 약 5.2㎞의 거리에 계속해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진행방향 정면에는 남원 시가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남원과 장수를 연결하는 19번 국도를 따라 마을과 들녘이 구불구불 펼쳐진다. 소나무가 빽빽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등로를 동리 뒷산 산책로를 걷는 것처럼 편안히 걷다보면 남원시와 운봉읍을 24번 국도가 연결하는 여원재에 다다르게 된다.

이 지역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역사의 풍상을 많이 겪은 곳이다. 대체로 영남과 호남은 백두대간의 헌걸찬 능선이 경계를 갈라서 산을 넘거나 큰 재를 넘지 않고서는 왕래를 할 수가 없는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호남에 속하는 운봉과 인월은 팔량치(八良峙, 해발 513m)를 사이에 두고 경남 함양과 평평한 고원 구릉지로 연결되어 있어 양쪽 간의 접근성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좋은 곳이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중요한 국경이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섬진강을 따라 이곳까지 올라온 왜구들이 함양으로 진출을 꾀했던 곳이기도 하다.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서기 1380년 고려 말에는 왜적이 인월에 진을 치고 노략질을 해대자 훗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장군이 장졸을 이끌고 와서 왜군을 크게 섬멸했다고 한다. 이성계의 무공을 기린 황산대첩비가 지금도 운봉 신기리 람천 부근에 세워져 있고 매년 8월15일에 황산대첩 제를 올린다고 한다. 여원재의 지명 유래는 이 재에서 왜적에게 봉변을 당한 여인이 자결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이성계가 여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고갯마루에 여원(女院)이라는 사당을 짓게 함으로써 이후 고개 이름이 여원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기 1894년에는 동학농민군이 남원에서 운봉, 함양으로 진출하려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양반과 유생, 향리로 구성된 민보군에 의해 괴멸되었던 곳이다. 또한 1950년 전후로는 지리산을 근거로 한 남부군이 이 지역을 무대로 치열하게 빨치산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아픔의 역사가 되풀이되었던 현장이기도 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동서화합 차원에서 급하게 건설됐던 88고속도로가 이제는 번듯하게 4차선으로 제대로 된 고속도로로 다시 만들어졌다. 말끔하고 훤하게 영호남을 향해 열린 저 고속도로처럼 이제는 두 번 다시 백두대간을 경계로 민초들이 아파하는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면서 백두대간 여원재에 내려섰다.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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