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8)김정린 도의원

▲ 김정린(맨 앞줄 왼쪽 네번째)씨가 1944년 정미소 종업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시 김씨가 운영했던 병영정미소는 경남에서 제일 커 종업원이 40여명이나 되었다. 사진에는 ‘합자회사 주식회사 병영정미소 종업원 일동 소화 19년’이라 적혀 있다.

국회의원 중 울산에서 가장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 김성탁씨였다면 도의원으로 가장 격동의 세월을 보냈던 인물이 김정린씨다.

병영출신으로 초대 도의원을 지냈던 그는 나중에 김택천과 김성탁 의원이 출마했을 때 그들을 돕는 등 한 때 울산 정치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때 정미소 2곳 운영
경남 최대 규모…엄청난 부 축적
1952년 초대 경남도의원 선거
울산 4개 선거구 중 제2선거구에
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
이후 4대 총선때 김성탁 후보
선거 총책 맡아 당선에 큰 공

1952년 치러진 초대 경남도의원 선거 때 울산은 4개의 선거구에서 4명의 도의원을 뽑았다. 김씨는 이중 제2선거구에서 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출마당시 51세였고 정미소를 운영했다.

이 때 그와 함께 당선된 사람으로는 방어진 거부 백상건씨와 언양 출신으로 도의회 부의장을 지낸 후 8대 총선에 출마하는 박원주씨가 있다. 울산에서 5, 6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최영근 의원도 이 선거에서 도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김씨가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돈이 많았고 이 돈을 선거자금으로 아낌없이 썼기 때문이다. 당시 어린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다녔던 김홍명 전 울산대 교수는 “선거기간 동안 선거요원들이 매일 집으로 와 다락에서 엄청난 돈을 포대에 담아 갔는데 유세장에 가보니 유권자들이 술과 밥을 배부르게 먹은 후 아버지께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아버지가 대단히 자랑스러웠다”고 회상했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제대로 된 기업이 없었지만 김씨는 병영에서 큰 정미소를 차려놓고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 병영에서 경제적으로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조용백씨가 있었지만 현금 동원 능력에서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조씨는 당시 양조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김씨가 정미소를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다. 이 때 울산의 부자 정해영씨의 정미소를 사 들여 크게 확장한 후 울산군청의 공출미를 모두 찧었다.

해방 전후 그의 정미소는 울산은 물론이고 경남도에서 가장 커 종업원만 해도 40여명이 넘었고 트럭이 2대나 있었다. 자가용으로는 영국산 지프가 있었다. 이 무렵 그는 언양정미소도 사들였다. 이 정미소는 안효식 의사가 언양에서 운영했는데 안씨가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자살하자 김씨가 사들여 운영했다.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이 돈을 아낌없이 썼다. 일제강점기에는 부산까지 가 쇼핑을 했다. 당시 부산에는 영도다리 입구에 미나까이 백화점이 있었다. 이 백화점은 6·25때는 5육군 병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산상공회의소가 들어서게 되는데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되어 있다.

“일제 말 병영초등학교에서 봄 소풍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기 위해 대문을 나서는데 아버님이 부산으로 간다고 해 소풍을 가지 않고 아버님 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 백화점에 들러 모자와 신발을 샀는데 그 모자와 신발이 너무 좋아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납니다.” 김 전 교수의 회고다.

김씨가 큰 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시집 올 때 재산을 많이 가져왔기 때문이다. 김씨는 1917년 아버지 김교찬과 어머니 이애완 사이에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어머니 이씨가 무남독녀로 시집을 올 때 친정 재산을 많이 가져왔다. 이씨 친정은 당시로서는 농가의 가장 큰 재산인 소를 많이 키워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씨는 형제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어릴 때 돌아가고 김정탁과 김정복 두 명의 형들 아래에서 자랐다. 이중 김정탁은 송석하와 함께 부산상고를 졸업한 후 고종 때 시종부원경을 지냈던 송태관이 태안에서 간척사업을 벌일 때 함께 일했다. 이후 울산으로 와 동생 김씨의 정미소 일을 도왔던 그는 병영 역 근처에서 기차사고로 사망했다.

김정복은 반구동 서원 마을의 부농으로 가장 큰 집에서 살았는데 그의 아들 호경은 육사 졸업 후 백마부대 장교로 월남전 에서 전사했다.

김정린씨는 공부는 못했지만 사업 수완이 좋았다. 울산초등 졸업 후 일본 교토 농전에 입학했지만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한 그는 농전을 중퇴하고 울산으로 왔다.

19세에 우정동 출신의 윤봉순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그는 1940년 정미소를 인수해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 그의 집이 얼마나 부자였나 하는 것은 김씨가 서울 화가를 초빙해 미술 공부를 했다는데서 알 수 있다.

당시 그의 집에는 좋은 그림들이 많았다. 김씨의 어머니는 서울 화가가 그린 신선도 병풍을 갖고 있었고 부인 윤 여사는 서울에서 사 온 화조도 병풍을 방에 두었는데 이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 병영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병영의 유명인들 중 그림 공부를 위해 김씨 집을 찾은 사람도 많았다. 병영 면장을 지냈던 윤남국과 신복조, 최현태, 유창식씨가 자주 드나들었다.

신 면장은 글이 좋아 지금도 병영 사람들 중에는 그의 글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당시 약사동 큰 한옥에서 살았는데 빨치산들이 밤낮없이 출몰하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다. 약사동 옛집은 현재 큰 식당이 되어 있고 그의 무덤은 식당 뒤에 있다.

해방 당시 동대산과 연암동 일대에 자신의 산이 많았던 김씨는 그가 어릴 때 살았던 서원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 뒷산을 사 기증했다. 이 산에는 나중에 대지아파트가 들어섰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때 아파트 업자에게 산을 판돈으로 서원 마을에 전기와 수도를 넣고 노인정까지 세웠다.

이처럼 병영의 큰 손으로 살았던 김씨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때는 도의원 선거를 치르면서다. 이 때 그는 너무 많은 돈을 선거자금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가족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형제들까지도 보증을 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어려움 중에도 사업을 서울로 옮긴 그는 서울에서 정선석탄광산을 개발해 다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이 무렵 시작한 하동고령토개발은 당초 기대했던 일본 수출이 되지 않아 고전했다.

이후 그는 용산에 동양연료주식회사를 차려놓고 교통부로부터 무연탄과 유연탄을 배급받아 이를 조개탄으로 만들어 납품하는 사업을 했다. 이 사업은 조개탄을 쓰는 열차 대신 전동차가 곧 개발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958년 2월 동아일보에는 김씨가 조개탄을 제때 교통부에 납품하지 않아 입건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가 김성탁씨의 요청으로 울산으로 와 4대 총선에 뛰어든 것은 이처럼 서울에서 사업을 왕성하게 하고 있을 때였다. 울산 헌정사상 최악의 금권선거로 기록되고 있는 4대 총선은 우리나라 무연탄계를 대표하는 정해영과 김성탁씨가 맞붙었기 때문에 울산 사람들은 이 선거를 ‘무연탄 선거’라고 불렀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때 정 후보는 선거본부를 학성여관에 차렸고 김 후보는 학성여관 인근 함양집에 두었다. 동구 어물동에서 태어나 청년기 병영으로 이사 왔던 김 후보는 정 후보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정 후보를 따라 갈 수 없었다.

그러나 해방 후 부산 범일동으로 이사를 간 김 후보는 당시 조선방직에서 나오는 광목에 자수를 놓는 의류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이 돈을 밑천삼아 석탄사업을 시작했는데 풍곡탄광에서 질 좋은 무연탄이 쏟아지면서 하루아침에 정 후보와 어깨를 겨루는 무연탄 업자가 되었다.
 

정 후보와 김 후보 둘 다 한걸음도 물러날 수 없는 용호쌍박전에서 김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그의 선거 총책을 맡았던 김정린씨가 선거자금을 많이 뿌렸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선거에서 돈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김 후보는 이때 자유당 재정위원장인 이용범 후보의 지원 아래 많은 돈을 선거자금으로 썼고 그 중심에 김씨가 있었다.

선거 후 다시 서울로 간 김씨는 후암동에 살면서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일어날 때 경운기 부속품을 만들어 대동공업사에 납품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 무렵 서울에 세기건설을 차려 놓고 건설 사업에도 손을 대었던 그는 윤동수씨가 울산 시장으로 있을 때 코리아나 호텔에서 태화교에 이르는 강변도로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때도 그는 울산에 오면 언제나 경주로 가 불국사 호텔에서 자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나 1978년 62세로 서울 메디컬센터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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