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5)최영근과 제일생명

▲ 70년대 초 한국기원 총재였던 최영근(왼편) 전 국회의원이 강철민 기사와 벌이는 대국을 모 방송국에서 방영을 위해 촬영하고 있다.

7대총선의 또 다른 특징은 우송 최영근 의원의 정계 은퇴다. 최 의원은 비록 2선 의원이었지만 6대 국회에서 비중 있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지역구도 탄탄했다. 김기홍, 안도원, 정계석, 심완구 등 나중에 울산을 대표하는 야당 인사들 중에는 최 의원 아래서 정치를 시작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최 의원의 낙선은 지금까지 그를 도왔던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7대 총선에서 최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박임근(83, 서울거주)씨 얘기다.

7대총선 낙선 주원인은 자금부족…친구 서정귀 사장, 사장직 천거로 입사
최 의원 노력으로 사측 자금사정 개선, 사옥 건립하고 한국기원 총재 지내
물욕 없던 최 의원, 70년대 중반 탄탄해진 회사 인수 거절하고 다시 재야로

“어른이 7대 총선에서 떨어진 요인 중 하나가 자금부족이었습니다. 어른은 그의 오랜 친구였던 서정귀 사장만 믿고 있었는데 서 사장이 공화당 압력을 받아 최 의원에게 돈을 줄 수 없게 되니 선거막판에는 표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나마 어른 측근들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어른이 당선만 되면 경제적으로 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낙선했으니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요. 선거 후 나를 포함해 서울에서 울산까지 와 어른을 도왔던 사람들이 10여명 정도 되었는데 서울로 가 보니 어른이 국회 사무실도 비워주어 우리들이 만날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힘들어 우리들은 매일 국회에서 가까운 무교동 솔로몬 다방을 배회했습니다. 그런데 다방에서 만나면 한 잔에 30원했던 차를 마셔야 했는데 차 값도 낼 형편이 못되어 처음에는 외상을 했는데 이마저 하루 이틀 밀리다보니 막막했습니다.”

어려움은 최 의원이 더 컸다. 경제적 어려움도 컸지만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차에 서정귀 사장이 최 의원에게 권유한 자리가 제일생명 사장이었다. 박 보좌관의 얘기는 계속된다.

“하루는 솔로몬 다방에서 당원들과 한담을 하고 있는데 어른이 저를 불러 만났더니 서 사장이 제일생명 사장직을 맡아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얘기했더니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우리가 제일생명으로 간다고 당을 바꾸는 것도 아니니까 다음 선거 때 까지는 그곳에서 버티어 보자’고 말해 제일생명으로 모두 갔는데 이것이 정치를 그만두는 계기가 될 줄은 어른은 물론이고 우리도 몰랐습니다. 어른은 이 때 이후락씨가 중앙에서 활동하는 한 울산에서 야당이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도 제일생명 사장으로 가면서 그 곳에 오래 있을 생각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일생명 초기만 해도 어른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 8대 총선 때는 그를 따라 제일생명으로 온 울산 사람들을 모두 울산으로 보내어 최형우 후보를 돕도록 했습니다.”

박 보좌관은 또 “지금까지도 많은 울산 사람들이 어른이 제일생명 사장으로 온 것이 이후락씨의 권유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면서 “어른이 제일생명 사장이 된 것은 순전히 서 사장의 천거 때문이었다”고 강조한다. 최 의원이 제일생명로 갈 때 서 사장이 대표였지만 제일생명은 적자를 계속 내어 시중 6개 은행의 관리 하에 있었다. 이 때 서 사장이 회사를 책임지고 운영할 사람을 찾던 중 최 의원을 사장으로 앉혔다는 것이 박 보좌관의 주장이다.

서 사장은 통영 출신으로 최 의원과는 경남도의원 시절부터 친해 민주당 시절에는 장면 내각에서 정무차관을 함께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 사범 동기였던 서 사장은 5·16후 야당 생활을 접고 박 정권 아래서 재무부 차관을 거쳐 국제신문과 호남정유 사장을 지내는 등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최 의원이 제일생명으로 갈 때만 해도 회사가 을지로에 있었는데 3층으로 시설이 열악했다. 그러나 최 의원이 사장이 된 후 직접 일선에 나서 철도청과 금융계 등 국영기업체의 보험을 많이 유치하다보니 회사 자금사정이 갑자기 좋아졌다. 이러다보니 새 직원들이 많이 필요해 울산 사람들이 대거 제일생명에 입사했다. 이 무렵 최 의원 주위 사람들은 “최 의원이 정치보다는 경제로 일찍 진출했더라면 더 성공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당시 이 회사에 입사한 인물로는 최 의원의 제일생명 비서실장을 지냈던 박임근씨와 울산에서 명다방을 운영하면서 최 의원을 도왔던 이상숙씨가 있다. 이씨의 경우 이 회사에서 영업 전무까지 지낸 후 정년퇴임했다. 영초당 한의원의 이상원씨는 선거 때 최 의원을 도왔던 삼촌 이용우씨의 추천으로 이 회사에 입사한 후 골프를 배워 울산 최초의 싱글 골퍼가 되었다. 그는 이 무렵 승마도 배워 울산에 와서도 말을 타기도 했다. 그는 워커힐에서 골프를 쳤고 천호동 경마장에서 말을 타며 멋을 부렸다.

70년대 초반에는 회사 경기가 좋아져 사무실도 을지로에서 영동 신사동으로 옮겼다. 이 때 사옥을 12층으로 지었는데 당시로서는 영동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최 의원은 이 무렵 목동에 집도 새로 짓고 또 평소 바둑을 좋아해 한국기원 총재도 지냈다. 국수 조훈현 국회의원과 김인씨를 재정적으로 도와 이후 우리나라 바둑의 전성시대를 여는 초석을 닦았다. 한국권투위원회 위원장도 지내면서 김덕팔과 홍수환 등 세계 챔피언도 키웠다. 한국권투위원회 위원장 자리는 나중에 이후락 비서실장을 지냈던 이장우씨가 맡아 유재두 선수를 키워내는 등 한국 복싱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울산정치인들 중에는 바둑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많다. 민주당 시절 정해영 의원은 그가 4대 총선에서 자유당의 막강한 돈 줄이었던 김성탁 후보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이 바둑의 원리를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서전에서 “바둑에는 ‘아생연후 상대방을 공격하되 약한 곳을 집중 공략해야 한다’는 이론이 있는데 이 원리를 이용해 김성탁을 꺾을 수 있었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정 의원은 6·25 전후 바둑을 배우기 위해 당시 신설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조훈현 기사를 혜화동 자기 집 가까이 전학을 시킬 정도였다. 당시 정 의원의 서린동 사무실에는 김진만 국회부의장과 김형두 국제신문 사장이 매일 와 대국을 벌였다.

이후락씨도 실력에서는 최 의원과 정 의원에 미치지 못하지만 바둑의 고수였다. 그는 1970년 한국기원 총재에 취임했는데 이 무렵 울산MBC 사장이었던 정택락씨가 ‘한국기원총재배 전국 바둑대회’를 동헌 아래 농협 2층에서 열었다. 이 때 이미 명성을 날렸던 조훈현씨가 이 대회에 참석해 바둑계의 관심을 끌었다.

울산출신 정치인들이 바둑을 좋아하자 이들의 대국을 준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울산 남목 출신으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동조씨다. 김씨는 1974년 서울 무교동에서 바둑대회를 열기로 하고 이들에게 연락해 허락을 받았다. 이 대회 실무는 이후락 쪽에서는 이장우 비서, 최 의원쪽에서는 최영보 집사, 그리고 정 의원쪽에서는 당시 서린동 사무실에서 있었던 최종두씨가 맡아 시간과 장소를 사전 약속했다. 그러나 이 대회는 최 의원이 갑자기 호남에서 열린 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최 의원이 제일생명을 떠난 때가 70년대 중반이다. 회사 경영이 좋아져 서 사장이 회사를 조양상선에 넘기자 최 의원은 이후 일 년 정도 근무하다가 물러났다.

“서 사장이 조양에 회사를 넘길 무렵에는 회사 재무구조가 탄탄해 제가 어른께 이 회사를 조양에 넘기지 말고 우리가 인수하자고 여러 번 권유했는데 어른이 ‘남의 회사 사장으로 들어왔으면 월급쟁이로 끝나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고집해 결국 회사를 인수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아쉽습니다.” 박 보좌관의 얘기다.

이후 최 의원이 다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1988년 13대 총선 때다. 이 때 김대중 중심의 평민당이 ‘호남당’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울산 출신의 최 의원에게 비례대표 자리를 주어 영남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무렵 최 의원은 김대중과 함께 울산을 여러 번 다녀갔지만 당시만 해도 지역감정의 골이 깊어 평민당으로 간 그를 울산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지 않았다. 14대 총선 때는 다시 평민당 비례대표를 노렸지만 당에서 정치헌금을 요구하는 바람에 거절하고 분당으로 이사 후 2004년 타계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는 고향인 울주군 두동에 있었지만 대곡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면서 작은 아들이 살고 있던 충북의 충주호 인근으로 이장해 지금은 그 곳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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