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느림의 미학, 정월대보름 음식

 

겨울 부족한 영양분 보충할 오곡밥에
나물까지 먹으며 무기질 등 섭취 도와
병에 대한 저항 높이고 식습관도 유지

정월대보름 음식을 미리 준비한다. 선선한 곳에 보관해 둔 묵은 나물과 오곡밥에 들어갈 잡곡을 꺼내어 손질하고 빠진 재료는 없는지 챙겨본다. 평소 과묵한 남편이 농을 건다. “우리 금옥씨는 솥뚜껑 운전할 때가 가장 예뻐.” 손이 많이 가는 대보름 음식을 가만히 앉아 받아먹기가 미안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더 맛있고 정성스런 정월대보름 음식을 해주고 싶어진다.

절기음식은 오랜 세월 조상들의 지혜가 차곡차곡 쌓여 완성된 음식이다. 그 중 정월대보름에 먹는 오곡밥, 묵은 나물, 약식은 대표적인 슬로푸드(slow food)다. 우리 몸이 조화롭게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균형이 맞춰져 있다. 달팽이처럼 ‘느리게 살기’의 미학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음식들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제철에 나오는 콩과 채소를 가꾸어 걷어 들이고, 이를 찌고 말려 잘 보관한 뒤 정월대보름 음식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가?

온갖 곡물이 담긴 오곡밥은 영양 면에서 뛰어난 음식이다. 찹쌀, 검은콩, 팥, 수수, 차조로 지은 오곡밥은 긴 겨울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해 건강하게 봄마중을 하도록 도움을 준다. 찹쌀은 아밀로펙틴(amylopectin) 구조로 돼 있어 소화기능이 약한 사람이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 팥은 칼륨이 풍부해 붓기를 빼고 노폐물을 배출하는 효과가 있다. 콩의 식물성 단백질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내려 주고 혈관을 튼튼히 만든다. 또 생리 활성 성분(Phytochemical)은 암과 성인병을 예방하는데도 도움된다. 수수에 들어 있는 프로안토시아니딘(poroanthocyanidin)은 방광의 면역 기능을 강화시키고, 세포의 산화 스트레스를 줄여서 염증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차조는 쌀에 부족한 철분이 풍부하여 빈혈 개선에 도움이 된다. 비타민B1과 B2까지 골고루 갖춰 불면증이 있을 때 꾸준히 섭취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오곡밥과 찰떡궁합은 묵은 나물이다. 우리나라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는 대보름에 나물먹는 풍습을 잘 알려준다.

‘박나물·버섯 등의 말린 것과 대두황권(大頭黃卷·콩나물순을 말린 것)·순무·무 등을 묵혀둔다. 이것을 진채(陳菜·묵은 나물)라 한다. 정월대보름에 이 것들을 반드시 나물로 무쳐 먹는다. 대체로 외꼭지·가지고지·시래기 등도 모두 버리지 않고 말려두었다가 삶아서 먹는다. 이것들을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 박금옥 개운초등학교 영양교사

지역마다 묵은 나물 종류는 다르다. 9가지 이상 만들어 먹으면 한 해 동안 탈 없이 지나게 된다는 속설도 있다. 묵은 나물은 겨우내 부족하기 쉬운 식이섬유와 무기질을 섭취하도록 돕는다. 병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고 바람직한 식생활 습관을 유지하게 해 준다.

묵은 나물은 종류나 건조 상태에 따라 불리기와 볶는 시간이 달라지는 등 조리법이 천차만별이다. 무청시래기는 찬물에 소주를 한 숟가락 넣고 푹 삶은 뒤 이틀 정도 그 물에 그대로 담가놓는다. 톡특한 냄새가 나는 말린 취나물은 쌀뜨물에 삶아 묵은 냄새를 없앤다. 고구마줄기는 삶은 물에 2~3일 푹 담가둔다. 고사리와 토란줄기는 삶고 물 버리기를 두세 번 반복해야 아린 맛이 빠지고 식감이 부드러워진다. 적당히 무르게 잘 불려진 묵은 나물은 물이 똑똑 떨어질 정도로 물기를 짜낸 뒤 은근한 불에서 들기름으로 뜸을 들이듯 서서히 볶는다.

정월대보름에는 기다려지는 음식이 또 있다.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한데 품은 복쌈이다. 어린 시절, 친청엄마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잘 비벼서 잘 구운 김에 싸서 주셨다. 덕분에 일 년 내내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복쌈으로 친정엄마의 마음이 나에게 전해졌듯이 이번 정월대보름에는 나의 딸들에게 그대로 전해줄 것이다. 딸은 또 그 딸에게 대보름 음식으로 내리사랑을 전해주게 되리라.

박금옥 개운초등학교 영양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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