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읍에서는
어디로 가나, 등 뒤에
수평선이 걸린다
황홀한 이 띠를 감고
때로는 토주(土酒)를 마시고
때로는 시를 읊고
-중략-
그럴 때마다 나의 등 뒤에는
수평선이
한결같이 따라온다
아아 이 숙명(宿命)을 숙명 같은 꿈을
마리아의 눈동자를
눈물어린 신앙을
먼 종소리를
애절하게 풍성한 음악을
나는 어쩔 수 없다

▲ 엄계옥 시인

전쟁 중 서른여덟 유부남 시인은 제자와의 밀애로 가정과 교수라는 명예마저 버리고 도피처로 제주도를 택한다. 넉 달 후 그들 앞에 나타난 아내 유익순은 여벌옷과 생활비를 놓고 돌아간다. 아내가 다녀간 후 제자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배를 타고 떠난다. 이별 장면은 ‘이별의 노래’ ‘떠나가는 배’로 남았다. 지탄받아야 할 대상이 시인과 사랑이라는 명분하에 노래의 배경이 된 것이다. 이 시는 제주에서 시인의 생활을 간접으로 보여준다. 먹구슬나무가 있는 키 작은 집과 서점. 어딜 가나 수평선처럼 따라붙는 수군거림을 숙명이라 여기며 ‘숙명 같은 꿈’에 최면을 걸어 견딘다. 신앙 속 먼 종소리의 애절한 울림마저 새로 시작한 사랑 앞에선 속죄가 아닌 음악으로 들림을 어쩔 수 없다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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