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79)차재훈과 8대 총선 공천

▲ 8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 울산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있었던 차씨는 공천 경쟁을 벌였을 경우 금배지를 달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해 최형우씨가 후보가 되어 금배지를 달았다. 울산에 사는 동안 차씨가 살았던 복산동 집터는 현재 울산교회 주차장이 돼 있다.

근대화 재벌인 차용규씨 장남으로
장인 김좌성씨도 유명한 땅부자
日와세다 대학 나온 지식인으로
서울서 인쇄소 차려 큰돈 벌기도

신민당 울산지구당 부위원장으로
공천 나섰으면 금배지 달았겠지만
혼탁한 정치판 사정 탐탁지 않았고
평생 남들과 경쟁해본적도 없어 고사

8대총선 공천과 관련 최형우 후보가 두려워했던 인물이 김재호 박사와 차재훈 부위원장이었다. 이들 둘은 최 후보에 비해 명망이나 재정에서 앞서 모두 공천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최영근 의원 시절부터 대동의원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울산의 야당 인사들을 도왔던 김 박사는 이 무렵 이미 울산 야당의 대부가 되어 공천 경쟁에서 최 후보의 어려운 상대였다. 더욱이 중앙당은 7대 총선결과 울산지구당이 사고지구당이 되자 김 박사를 8대 공천자로 내정을 해 놓은 상태였다. 이 때 김 박사를 가장 밀었던 야당 인사가 정해영씨였다.

울산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있었던 차재훈씨 역시 최 후보로서는 가문과 학력을 볼 때 힘든 상대였다. 차씨는 해방 전후 울산 최고 부자 차용규씨의 장남으로 일제강점기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장인 역시 ‘울산 최고 기부왕’ 김좌성씨로 본가와 처가가 각각 만석꾼 집안이었다.

차용규씨가 각종 신생 기업을 많이 가졌던 근대화 재벌이었다면 장인 김씨는 땅 부자였다.

조선 조 말 울산으로 온 김씨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으로 울산에 사는 동안 후학 교육에 관심을 가져 울산초등학교와 울산농고가 설립될 때 가장 많은 돈을 기부했다. 특히 그는 울산농고 건립 때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희사해 울산농고 1회 졸업 앨범에는 그의 사진이 맨 앞에 크게 실려 있다. 당시 그는 서울 안국동에 집을 두고 서울과 울산을 오갔다.

손이 귀한 3대 독자였던 김씨는 7남매를 두어 이중 딸 한 명을 차재훈씨에게 시집보냈다. 김씨는 6·25 무렵 작고했는데 그의 아들 재문씨 역시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했다. 재문씨는 해방 후 여운형씨가 이끌었던 건국준비위원회 울산지부장을 맡았는데 이후 서북청년단의 등쌀에 많은 재산을 모두 강탈당했고 나중에는 부산으로 피신까지 해야 했다. 현재 옥교동 한식당 외갓집이 김씨가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그가 부산으로 피신할 때만 해도 고래등 같은 건물이 12채나 되었다.

김 박사와 차씨는 이런 호 조건에도 8대 총선에 나서지 않았다. 김 박사가 공천에 나서지 않은 요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사실이 없다.

당시 공천 과정은 최형우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에 잘 나타나 있다.

“최영근 의원은 낙선 후 제일생명 사장으로 가면서 지구당 위원장직을 당시 부위원장이었던 차재훈씨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입후보 할 뜻이 처음부터 없었다. 8대 총선을 앞두고 지구당 위원장을 다시 선출할 것이 명백했지만 내가 선뜻 나설 처지는 못 되었다. 내 나이가 어리기도 했거니와 우리 당원 모두가 존경하고 또 울산지역 전체 야권의 정신적 대부이기도 한 김재호 박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병원을 경영했는데 덕망이 높았다. 나는 그를 찾아가 지구당 위원장직을 맡아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김 박사의 지구당 위원장직에 대한 고사는 완강했다. 그렇다면 내가 한번 나서 보리라. 그 무렵 울산에 나만큼 알려져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8대 총선에서 최 후보와 공천 경쟁을 벌였던 사람은 김 박사도 차씨도 아닌 언양 출신의 오민근씨였다. 오씨 역시 최영근 의원 때부터 야당 생활을 했지만 최 후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차씨는 왜 이 선거에 나서지 않았을까. 차씨가 공천을 포기한 요인으로 그의 성격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살았던 차씨의 경우 최 후보와 공천경쟁을 벌이는 자체를 번거롭게 생각했을 것이다.

차씨의 사위 박임근씨(83, 서울거주)는 “장인 어른은 당시만 해도 울산 사회에서 명망이 높아 최영근 의원의 부탁으로 부위원장이 되었지만 여야가 갈라져 싸우는 혼탁한 정치 자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생을 남과 경쟁을 벌여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당원들이 추대를 했더라면 나섰을지 모르지만 본인 스스로 공천에 나선다는 자체를 싫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차씨는 평생을 돈을 모르고 살았다. 차씨의 부친 용규씨는 단순한 땅 부자가 아니었다. 해방을 전후해 양조장, 정미소, 인쇄소, 제재소, 자동차 사업 등 울산의 큰 기업은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는 일제 말 조선총독부에 전투기를 헌납했을 정도로 부자였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에 여러 번 불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부자로 살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 해방 후에는 울산읍장과 읍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차재훈씨가 돈을 벌어본 적이 두 번 있다. 일제강점기 서울 휘문고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했던 그는 중앙의 고위직 인사들을 많이 알았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일본을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면 울산 집에서 보낸 세단이 기다리고 있어 이 차를 타고 울산까지 왔다.

특히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박술음(朴術音)씨와 친했는데 해방 후 그가 3대 사회부 장관이 되었다. 이 때 박씨가 차씨에게 서울 오장동 중부경찰서 앞에 인쇄소를 차릴 것을 권했다. 그리고 관공서 일을 많이 주어 많은 돈을 벌었다.

사업이 이렇게 번창하자 그는 사업 확장을 위해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울산 재산을 모두 팔아 서울로 가 큰 인쇄소를 차렸다.

4명의 아들을 두었던 차용규씨는 해방 후 아들들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했다. 장남 재훈씨에게는 양조장을, 차남 재준씨에게는 인쇄소를 그리고 셋째 재수씨와 넷째 재우씨에게도 정미소와 목재소 등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재훈씨가 서울에서 한창 인쇄업으로 재미를 볼 때 그의 큰 딸 정숙이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 딸은 나중에 최영근 의원의 비서 박임근씨와 결혼하는데 중매는 최 의원이 국회의원 시절 울산지구당 총무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박송삼씨가 섰다. 이후 사업이 번창하자 차씨는 울산으로 다시와 막내 재우씨를 제외한 다른 동생들의 재산도 모두 서울로 가져가 인쇄 사업을 크게 확장했는데 그것이 화가 되었다.

사업 확장 후 얼마 되지 않아 6·25가 일어나 이 많은 재산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울산에서 곤궁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울산에서 그는 한동안 울산농고에서 사회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무렵 동생 재준씨도 제일중학교 수학 교사로 근무했는데 그는 특히 미적분학을 잘 가르쳐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1956년에는 차용규씨가 울산읍장 선거에 나서게 되는데 이때 아들 재훈씨의 사업 실패로 돈이 없어 선거운동원도 두지 못하고 혼자 지팡이를 들고 도심을 돌면서 외로운 선거를 치러야 했다.

이런 어려움 중 재훈씨가 부친의 후광으로 15대 울산 수리조합장이 된 것이 1960년이다. 당시 수리조합장 자리는 농민들의 수세를 취급해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자리였다. 그가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부친의 후광이 컸지만 원체 돈을 몰랐던 차씨는 조합장 일 년 만에 5·16이 터져 빈손으로 나왔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가 신민당 울산지구당 부위원장이 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5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던 최영근의원이 그를 부위원장으로 영입해 8대 총선 전까지 그는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울산에 사는 동안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복산동 제법 큰 집에서 살았다. 그가 살았던 집터는 현재 울산교회 주차장이 되어 있다. 그는 이 집을 축구왕 최성곤의 동생 최민곤씨에게 팔고 서울로 가 차남 길호씨 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운명했다.

그는 한 때 울산 야당의 부위원장 자리에 있으면서 마음만 먹었다면 금배지를 달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제일 싫어했던 그에게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는 처음부터 생리에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유언 역시 소박했다. 운명하기 전 가족들이 그를 울산 청량면 선산에 모시려고 하자 “세상에 와서 해 놓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내가 조상 산소에 가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시신을 화장하라고 해 화장 처리가 되었다. 유족으로는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대령으로 예편한 차남 상호씨와 딸 정숙씨가 지금도 서울에 살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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