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창호 극작가

신라 경덕왕 때에 흉년이 들어 난리였어. 먹을 게 없어 마을엔 도둑이 끓고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곤 했지. 산적들은 행인의 봇짐을 털고 신체 일부를 잘라가기도 했다는 시절. 어느 날 왕이 중시에게 말했지. “곳간의 곡식을 꺼내 향득 사지에게 상을 내리시오.” 중시가 아뢰었지. “곳간에 곡식이 그리 많지 않은데 얼마나 내릴까요? 이왕 내릴 거 오백 석은 줘야지. 이 가뭄에 그 많은 곡식을 한 사람에게 내리시면 말이 많을 것입니다.” 경덕왕이 채근했지. “임금이 착한 백성에게 곡식을 내리는 데 누가 뭐라겠소. 어떤 집에서는 먹을 게 없어 자식을 강에 버리거나 산에 묻기도 하고, 차마 묻지 못해 잡아먹는 일도 있다 했잖소?”

향득이 왕 앞에 절뚝거리며 와서 엎드렸지. 왕이 그의 집안 형편과 자초지종을 물었겠다. “저희 가족은 열둘입니다. 일가친척까지 합치면 암만 아껴 먹어도 감당이 안 됩니다. 모두들 저만 보고 삽니다요. 암만 열심히 일해도 허기진 입을 감당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배를 곯아 앓으시니 할 수 없이 생살을 베어 구워드리는 수밖에요.” 왕이 감탄하여 말했지. “다릿살로 아버지를 봉양했으니 참으로 대단하도다. 백성의 귀감이 되니 어찌 곡식을 상으로 안 내리겠는가. 아버님께 쌀밥을 지어드리고 남은 곡식은 일가친척이 골고루 나누게나.”

자신의 다릿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한 이야기가 그냥 생긴 게 아냐. 신라가 삼국을 아우른 지 백 년이 지나도록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진 게 없었거든. 헐벗은 백성들의 뱃가죽이 등뼈에 붙는데도 당나라의 정치가 어떻고, 복식이 어떻고, 귀족의 밭뙈기가 얼마냐며 정치놀음으로 싸웠으니. 가뭄과 우박이 농사를 망쳐놓은 데다 지진까지 일어나도 궁궐은 밤마다 흥청망청. 가난한 향득에게 대한 왕의 보살핌은 천만다행한 일이었어. “나라의 형편이 어려울수록 못된 사람 벌하기보다 착한 사람에게 상을 줘야 기강이 바로잡히느니라. 우물쭈물하지 말고 향득에게 곡식을 내려라. 밥만 축내는 도둑들에게 나라의 곳간마저 털리기 전에.” 장창호 극작가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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